선물을 얘기할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 전야, 그리고 영리한 초콜릿 회사들이 만들어낸 현대적인 기념일들까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런 날들은 매년 정확히 같은 날짜에 어김없이 돌아온다. 한 번도 날짜가 바뀐 적 없는 이 정직한 시간표 앞에서 나는 마치 처음 시험지를 받는 사람처럼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미리 공부할 법도 한데 막상 그런 적은 없었다. 코트를 세탁소에서 찾아오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기 시작하는 그 무렵부터 악명 높은 질문이 다시 머릿속을 채운다. 도대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선물을 해야 하나? 어쩌다 벌써 연말이 되어버렸는지 사랑의 선물조차 당황스러운 이 마당에 감당하기 벅찬 질문이다. 매년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데 매번 오답을 적어 내는 열등생이 된 것만 같다. 그러나 연말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나는 다시 익숙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몇 해 전 생일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와 나는 우리 둘이 좋아하던 어느 레스토랑의 둥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신중하게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내부는 동굴 속처럼 어두웠고, 세심하게 자리 잡아둔 희미한 조명 덕에 머리를 맞대고 협동의 자세를 취해야만 간신히 메뉴판의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지독하게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종일 회사 일에 지친 때문인지, 샐러드를 기다리는 동안 피곤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찰나, 불쑥 마술을 부리듯 그가 어두컴컴한 테이블 밑에서 쇼핑백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승전 용사처럼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기뻤다. 식당을 예약하고 선물까지 준비한 그 다정한 수고가 기특했다. 그러므로 나는 쇼핑백 안에 그 무엇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하다못해 군고구마 한 봉지가 전부라 해도, 박차고 일어나 손뼉 치며 기뻐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종이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졌다. 그 속에는 아르누보 화풍을 잘못 배운 듯 화려한 꽃이 그려진 가죽 겉면에 둔기에 가까워 보일 만큼 금속 장식이 빼곡히 박힌 클러치 백이 들어 있었다. 그토록 어두운 공간에서도 선명한 존재감을 뽐내는 그 값비싼 가죽 뭉치 앞에서 나는 완전히 길을 잃었다. 혼란스러웠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언젠가 옷장을 정리하다가 옷들이 온통 무채색이란 사실에 대해 그에게 탄식하며 얘기했던 내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쩜 이토록 나에 대한 단서를 도통 찾아내지 못했을까? 나는 이제까지 나의 취향과 성향을 꽤 선명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내가 평소 동경하는 디자이너들의 책이 쌓인 선반을 그냥 지나친 걸까? 내가 흥얼거리는 음악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예술가들을 잊은 걸까? 내가 혹시 이 가방처럼 요란하고 위협적인 사람으로 보였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분명한 사실은 이 선물에 어울리는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그 디자인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든, 아니면 내 성격과 외모의 어떤 면이 그 가방과 닮았다고 판단했든, 모두 오답이다. 그건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 선물에 지불했을 상당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가 그토록 멀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몇 번의 계절을 함께 보냈음에도, 그가 나를 전혀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흔히 선물을 준비하며 떠올리는 질문은 가령 이런 것이다.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이 부족한가? 이런 질문들이 앞서는 이유는 상대의 필요와 결핍에 주목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금속 장식과 꽃 그림이 가득한 그의 선물도 내게 결핍된 것을 충족해주려는 과격한 방식의 다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물의 의미가 결핍의 충족이어서는 곤란하다. 실용적인 선물이 최악의 선물이 되기 쉬운 이유는 일상적인 결핍이 생각보다 쉽게 채워진다는 사실이고, 채워진 이후에 그 선물은 순식간에 유용성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고민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긴장된 마음으로 내민 그 선물이 하찮은 유용성의 잣대로 판단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한 예술이라는 분야의 가치도 바로 그 풍요로운 무용함에 있다. 가늠할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스스로 연마하고 고뇌한 예술가의 고귀한 정신은 단지 일상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데 허비되지 않는다. 귀중한 작품은 그 유용성을 넘어 값진 정신과 기억을 상징하며, 오랜 시간 동안 곁에 두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우리는 함께 나눈 시간과 기억을 상징하는 어떤 선물이, 그 쓸모를 완전히 잃어버린 이후에도 오랫동안 침실 한쪽에 소중하게 간직되길 원한다.

선물을 산다는 것은 정밀한 관찰과 반복되는 실험이 필요한 꽤 복잡한 일이다. 그러므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에게 완벽한 선물을 하겠다는 지나치게 낙천적인 목표는 세우지 않는 편이 낫다. 완벽한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 그것은 수많은 대화와 사소한 다툼, 여행, 그 여행이 남기는 기억과 둘만의 사적인 농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과정을 한바탕 경험할 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어떤 선물이 연인을 웃게 할지를 결정하는 단서는 그 시간들 틈에서 고고학자의 마음으로 더듬더듬 찾아갈 수밖에 없다. 공유한 경험 속에, 그 고고학적 시간 속에, 가장 즐거운 단서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쉬운 것 같다. 한편 그 말은 결국 상대방을 완벽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가 나를 완전히 이해하고 나의 결핍을 완벽히 채워주는 선물을 하리라는 기대를 놓아주기로 했다. 또 반대로 내가 상대방을 완전히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충족해줄 수 있다는 낙천적인 열정 또한 접는다. 그 대신 언젠가 이국적인 해변에서 함께 보낸 눈부신 여름과 그때 흘러나오던 음악, 그리고 서로를 간지럽히던 대화 속에서 그 단서를 얻기로 했다. 함께 보았던 타는 듯한 햇볕과 석양, 우연히 지나친 풍경을 보고 눈치채게 된 서로의 얼토당토않은 꿈과 희망. 그 사이 어딘가에 사적인 농담 같은 선물이 숨어 있다. 결국 그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은 이 관계가 무용해지거나 시들어가는 순간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의 가장 빛났던 순간을 문득 떠올리게 하는 작은 단서일 것이다. 그 단서를 두 손에 꼭 쥐여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장의 쓸모를 잠시 접어두고, 둘만이 아는 기억을 차곡차곡 모아 물건의 형태로 해석해내는 것. 그 누구도 쉽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돌아오는 이 까다로운 시험을 마주한 많은 이들은 쉬운 해답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묻는 일일 터다. 그리고 어쩌면 경제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선물에 지불한 비용이 애정의 척도가 될지도 모른다. 어느 예술가가 말했었나? 삶에서 첫째로 귀한 것은 가격이 없고, 둘째로 귀한 것은 대개 말도 안 되게 비싸다고. 삶을 예술의 경지로 고양하는 방법은 함께 나눈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기억하는 것이다. 또다시 연말이 다가오고, 나는 지난 1년을 회고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가격을 적을 수 없는, 우리만의 가장 귀하고 반짝이는 기억은 과연 무엇이냐고.

writer 김은수(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