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기적

선물을 고르는 건 자처한 일이지만, 내 전공이 아닌 게 분명했다. 부담스럽지 않아야 할 텐데, 어떤 식으로든 유용해야 할 텐데. 학생의 심정으로 유명 포털사이트와 패션 잡지를 뒤적였다. 휘황찬란한 ‘이달의 추천 선물 리스트’를 보며 이런 게 요즘 유행이라면 나는 지구에 사는 게 맞는 걸까 생각했다. 늪에 빠진 기분이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구해준 건 늘 애인이지만, 이 순간 나는 완벽히 혼자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당장 떠오르는 게 몇 가지 있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욕심이 과한가? 내가 아는 그에 관한 모든 정보와 지식과 함께한 경험을 토대로 가장 센스 있고, 취향과 맞물리며, 값지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물건을 고를 것이다. 애인을 떠올리며 선물의 단서를 찾기로 했다. 내가 그의 패션 감각과 어울리는, 그에게 꼭 맞는 사이즈의 옷을 고를 수 있을까? 글쎄. 다음은 그의 집. 더 필요한 게 있을까? 딱히. 없어도 될 것 빼고는 다 있다. 없는 걸 부족하다 여기지 않고, 경제성을 떠나 취향으로 이상을 펼칠 줄 안다는 점이 내가 애인에게 반한 이유 중 하나다.

옷장과 집을 지나, 지난 우리의 대화를 되짚으며 선물의 단서를 찾기로 했다. 때마침 그가 친구와 나눴다는 대화가 떠올랐다. “친구가 저와 잘 어울리는 향수라며 추천해줬는데, 맘에 쏙 드는 거 있죠.” 몇 계절을 연인으로 함께한 나는 이토록 찾기 어려운데, 친구인 그 사람은 단번에 그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새로운 물건을 고를 만큼 명석한가 보다. “플로럴 향인데, 제가 그런 향에 끌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과거 그는 내게 생전 향수를 사거나 뿌리고 다닌 적 없다 했던 터라, 향수는 선물 목록에서 당당하게 지웠었다. 하지만 그는 안 하던 일이라도 호기심이 생기거나 설득될 만한 점을 발견하면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향수를 건네는 건 그에게 또 다른 처음을 선물하는 일이 될 것만 같다. 기쁘다. 그의 친구에게 고맙다며 떡이라도 전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제품명이 뭐더라? 브랜드명은 선명히 기억나지만, 제품명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로션조차 바르지 않는 내 세상에는 없는 단어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무작정 그 향수 브랜드 매장이 있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기분 좋은 긴장감. 평소보다 보폭이 넓었고, 속도는 경쾌했다. 선물을 사러 가는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나 즐겁고 비장하다. 향수 브랜드 매장이 이웃처럼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처럼 보이는 층에 도착했고, 내가 찾는 향수 브랜드 매장의 직원을 찾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애인에게 선물할 향수를 사러 왔는데, 도무지 제품명이 기억나지 않아요. 플로럴 향이라고 했어요.” 향수 매장에서 플로럴 향의 향수를 찾는 건 쌀로 밥을 짓는다는 말처럼 당연해 황당한 게 아닐까 고민하던 찰나. “아마 이걸 거예요.” 짓궂은 마담처럼 친절한 직원은 잠깐 웃더니 시향 종이를 내밀었고, 충만한 꽃향기가 코끝을 에워쌌다. 애인에게서 이런 향이 난다면 어디서나 꼭 끌어안고 웃을 것만 같다. 이 향수가 맞을 것이다. 확신이 섰다. 샀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백화점에 들어설 때보다 가벼웠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향수 브랜드에서 출시한 제품 중 꽃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건 내가 산 향수가 유일하다. 부끄러움이 밀려온 건 나중의 일이었다.
선물과 함께 집에 왔다. 하지만 당장 건네지는 않았다. 급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애인이 가르쳐준 어른의 방식이다. 소파 정면에 있는, 눈에 잘 띄는 책상 위에 가만히 올려뒀다. 그는 집에 왔으니 요리를 해주겠다며 파스타를 만들어 예쁜 그릇에 담았다. “소스 양 조절을 잘못했어요. 그릇 줘봐요. 내걸 덜어줄게요.” 자기 그릇에 담긴 파스타 소스를 덜어주는 그의 손은 자상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한 상 배불리 먹은 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때마침 그가 향수를 발견했다. “저 주는 거예요?” 끄덕끄덕. 애인이 반짝 웃는다. “(손목과 목에 칙칙 뿌리고) 맘에 쏙 들어요. 맘에 드는 향수를 뿌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거군요. 위로받는 기분이에요. 아, 저 향수를 선물 받은 건 처음이에요.” 다행히 세상 모든 처음은 아름다운 법이다. 때마침 스피커에서 적당히 동화적이고 필요한 만큼 로맨틱한 가사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공간을 은은하게 감싼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그러지 않고 이 순간을 좀 더 즐기기로 한 건 애인에게 배운 여유다. 이 순간처럼 삶에서 오직 연애만이 줄 수 있는 새삼스럽고 편안한 시간과 수많은 우연이 모여 완성된 우리만의 운명적 순간이 드물게 있고, 이 모든 감상 또한 애인이 주는 선물이라 믿는다. 우리가 함께한 그날 저녁의 다정한 대화와 안락한 공기는 그에게 향수를 선물한 데서 비롯한 것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가 때마침 좋아하는 향수를 떠올릴 확률, 하필 소스 양이 부족해 자기 파스타를 귀여운 손으로 덜어줄 확률, 그리고 기적처럼 로맨틱한 노래가 약속한 것처럼 흘러나올 확률을 지나 복권에 당첨될 확률 같은 완벽한 순간일 것이다. 그와 나는 소수점에 달하는 작은 확률도 자주 통과하는 기적 같은 사이다.

선물을 고른다는 건 상대를 들여다보고 다시 알아가는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만의 일화와 상대의 취향을 고민하고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평소 애인의 말에 얼마나 귀 기울였나? 상대가 진정 좋아할 만한 걸 고르는 건, 그가 끝내 싫어하는 내 못된 습관을 지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사력을 다해 통과하면 연인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선물을 비롯한 연애를 위해 투자하는 정성과 노력과 호의는 고행이 아니라 관계를 위한 즐거운 여정이다. 그에게 그날 밤이 어땠는지 묻지 않았지만, 그는 집에서도 종종 향수를 뿌렸고, 당시 함께 들은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 나는 그 순간을 함께 누렸다. 마치 기적과도 같이 그런 날이 있었다.

writer 양보연(프리랜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