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행복은 뺄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2022년, 나는 2년 사귄 남자친구와 둘이서 낡았지만 잘 관리된 아파트를 구입해 같이 살기 시작했다. 50년이나 된 오래된 아파트인 데다 ‘투자가치’가 낮고, 대출금을 오래 갚아나가야 하지만 둘이 함께라면 감당 가능한 가격의 집이었다. 자취할 때부터 끌어안고 있던 오래된 가구와 가전제품을 버리고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과 침대를 새로 마련했다. 함께 살고, 함께 살림을 장만하고, 함께 20년 만기의 빚을 지는 일. 그러니까 현재를 공유하고 먼 미래를 약속하는 일. 대다수 사람들이 ‘결혼’으로 연결할 법한 삶의 방식. 여기서 우리는 결혼만은 빈칸으로 비워두기로 정했다.

사람들은 ‘결혼’이 빠진 관계, ‘부부’가 아닌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곤란해한다. 얼마 전 부모님을 대신해 조문을 간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을 만났다. 어른들이 대뜸 내게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축하를 건넸다. “…한 걸 축하한다.” 나는 ‘남자친구와’ ‘같이 살게 된 걸(살림 차린 걸)’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하지만 축하는 해주고 싶어 우물 쭈물하는 그분들이 우스우면서도 고마웠는데, 내 엄마 아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안절부절 못하는 쪽은 그들이 아니라 부모님이었을 거란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울적해졌다. 최근 산부인과에 잠깐 입원할 일이 있었다. 모든 병원 관계자가 간병인이자 보호자로 온 남자친구에게 “남편이세요?”라고 물었다. 윗집의 다정한 할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를 젊은 부부로 확정했다. 이웃끼리 진실한 관계를 한번 맺어볼까 하다가… 오해하시게 뒀다. 이런 수준의 에피소드야 싱거운 농담에 가깝다. 진짜 어려운 건 인정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내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생겨난다. 이사하기 전, 부모님께 남자친구와 함께 집을 샀고 같이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여기엔 ‘결혼’이라는 법적 관계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부모님은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딸이 결혼과 흡사한 방식으로 살겠다는 결정을 내린 데 안도하면서도,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엄마가 그랬다. 사실혼, 동거 같은 단어가 여전히 딸 가진 부모에게는 두렵고 거부감이 들 수 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대부분을 엄마의 자랑이자 기쁨으로 살아온 내게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감내하기 쉽지 않았다.

남자친구 역시 우리 삶의 형태에 100% 기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닌, 자기가 살아온 세상에선 그리 평범하지 않은 현실이 지금까지도 좀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그는 반려인인 내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고 싶고 본인 역시 결혼은 하든 말든 개의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비혼 커플이라서 맞닥뜨리는 이 모든 피곤한 상황을 견디느니 그냥 결혼을 해치우길 희망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자신이 결혼에 관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살 수 있던 헤테로 남성이자 그간 가족 공동체를 편안하게 느껴온 나름의 특권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깨달아 머릿속이 혼란스럽다고 했다.

나 역시 마냥 편치만은 않다. 나만 결심하면 모두가 행복할까,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참고 노력할 순 없을까. 몇 번이고 자문한다. 물음 끝에 도달하는 곳에는 언제나 같은 말이 있다.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을 자유’를 놓지 말 것. 불편한 것, 동의하지 않는 것, 확신 없는 행동을 하지 않을 권한이 나한테 있음을 잊지 않을 것. 대부분의 사람처럼 나 역시 행복해지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때론 행복이 허구라 생각했고, 때론 너무 멀어 가질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도 행복을 갖고 싶었다. 여전히 그렇다. 그러는 동안 깨달은 건 세상엔 좋은 것도 많지만, 꼭 그만큼 싫은 것도 많다는 사실이다. 내가 반길 수 없는 요소를 내 삶에 들이지 않는 것만큼 명확하게 행복해지는 비법이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이 기대한다는 이유로 불편한 일을 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인내하고, 후회하는 일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한 때부터 쭉 해온 생각이다.

결혼을 대하는 나의 완강한 태도도 거기서 비롯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본질은 취하되, 본질이 아닌것들은 가능한 한 내 삶에서 비워내고 싶다. 하지 않을 자유가 상충할 때도 있다. 결혼이 하고 싶은 내 남자친구와 그렇지 않은 나는 결정을 서두르는 대신 시간을 쓰며 대화를 나눈다. 대화를 통해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을 재검토한다. 신중하게, 하지만 가차 없이. 그 과정에서 각자의 어려움을 좀 더 세심히 알게 됐고, 좀 더 이해하게 됐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만큼 더 괴롭기도 했다. 좋은 건, 둘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인 삶에서 지금껏 가진 적 없던 안정감과 행복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동의한다. 내년, 후년, 그 너머의 시간을 함께 의논하고 계획할수록 관계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생겨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니 당장은 함께 발견한 행복에 좀 더 주목하기로 한다.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누구의 부모님도 만나지 않고 서울 우리 집에서 보낸 2022년 설 연휴, 침대에 누워 정유정 작가의 소설 <완전한 행복>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체기처럼 가슴을 누를 때면 약효 좋은 소화제처럼 이 말을 집어삼키려 한다. 소설 속 대사의 주인공이 나르시시스트이자 가스라이팅의 귀재인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이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사소한 건 빼버리기로 한다. 행복은 역시 뺄셈이야.

_WRITER 임유청 영화산업 가장자리에서 일하는 회사원. 퇴근 후에는 술을 마시거나 글을 쓰고, 주말에는 조조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까마귀의 모음 시리즈 <테크니컬러 드링킹>, <MORI IN PROGRESS>를 썼다. 현재 모두 절판.

 

② 나무는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입하를 알게 된 이후로 절기에 관한 책을 읽고, 이제는 계절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며 살아보고 있다.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배움을 주는 것이 절기라는 생각으로 살며, 동시에 그 삶을 지켜보는 중이다.

 

나무를 떠올린다. 모든 잎을 떨군 나무를 상상한다. 겨울나무다. 꽃도 잎도 없고 열매도 없이 가지만 남은 모습이 어딘가 텅 빈 듯 쓸쓸하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매해 만난 겨울나무, 그러나 이번 겨울에는 다르게 보인다. 지난겨울에는 나에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연말을 앞두고 만난 친구에게서 내년의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머쓱했다. 새해를 맞으면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해둔 것이 없고 그에 관해 별다른 마음 없이 지내고 있지만, 질문을 받고 보니 반드시 계획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초조한 마음이 생겨났다. 마치 모두가 새해 계획을 세웠는데 나만 하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생겼다. 그래서 계획을 세웠는가. 그게 그렇게 잘 되지 않았다.
해야 한다는 생각에 떠밀려 무언가 하는 게 영 내키지 않고, 무엇보다도 의욕이 일지 않았다.

그런 채로 시간이 흐르고 새해를 맞은 지 한참 지난 어느 날부터 하고 싶은 일이 생겨났다. 의욕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가뿐한 마음으로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연락해야 할 곳에 척척 전화를 걸고 메일을 보낼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운 적은 없어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 모습에 신기해하다가 알게 되었다. 그즈음이 이십사절기 중 ‘입하’라는 사실을. 무엇이든 쭉쭉 자라는 기운이 거침없는 시기, 여름의 입구, 입하. 비슷한 시기, 집과 가까운 작은 산에 아침마다 산책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 역시 계획한 게 아니지만,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시작됐다. 나무에 피어난 잎의 색이 나날이 진해지는 게 눈에 띄어 놀라웠는데. 그랬구나, 이런 게 입하의 풍경이로구나, 알게 되자 웃음이 났다. 어쩐지 성큼성큼 걷는 듯한 그즈음의 나를 돌아보며 ‘나도 자연의 일부였네, 그래서 이런 흐름을 타고 있나 봐’ 하고 생각하며 웃었다.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계획을 세우고 싶지 않던 지난해 겨울의 나도 지금의 의욕적인 모습만큼이나 자연의 흐름에 맞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던 거’ 아닐까 생각하며 느낀 안도감이었다.

입하를 알게 된 이후로 절기에 관한 책을 읽고, 지금은 계절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며 살아보고 있다.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지 깨달음을 주는 것이 절기라는 생각으로 살며, 동시에 그 삶을 지켜보는 중이다. ‘처서’ 무렵에도 그랬다. 여전히 더위 속에 있다고 느껴질 8월 말이지만 자연은 이미 가을에 들어선 때. 열매를 맺는 나무는 이때쯤부터 성장과 성숙을 멈추고 불필요한 가지와 잎을 떨군다고 한다. 농사를 모르는 인간의 눈에는 수확의 시기가 아직 먼 듯 보이지만,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열매가 땅에 떨어져도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여물도록, 밖으로 뻗어가는 성장을 멈추는 처서의 나무. 당시 나의 상황을 이러한 나무라 생각하며 들여다보았다. 봄과 여름부터 준비
한 것이 이어져 수확을 앞둔 상황인가. 이제 새로이 시작하려던 것은 없었나. 그렇다면 그게 무리는 아닐까. 시작의 의욕이나 성큼성큼 걸어나가던 때를 그리워하지 않고 한풀 꺾인 여름을 받아들이며 무엇을 멈추고 무엇을 진행할 것인가 살펴보고, 이미 예정한 것들은 이어가되 새로이 기획해 시작하는 일은 만들지 않기로 했다. 비우고 정리한 후, 남긴것은 봄과 여름에 계획하고 약속해둔 가을 단독 공연과 1년 전부터 써온 글을 엮어 책으로 출간하는 일이었다.

한풀 꺾인 여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제 나의 기세도 봄여름과 다르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일 혹은 활동을 정리할 뿐 아니라 마음가짐의 정리 또한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고자 했던 마음의 정리는 기대만큼 쉽지 않았
다. 책 출간과 동시에 시작된 단독 공연 예매가 순조롭지 않아 금세 의기소침해졌다. 마음은 다짐하거나 생각한 그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상황이 내가 받아들여야 할 열매란 말인가. 한동안 풀 죽어 지내다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내
마음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 나도 나에게 말을 걸어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니, 묻는 나와 대답하는 나로 나누어 대화를 시작해본다. 마음가짐을 정리하는 데는 이런 방법도 필요하다. 나와의 대화.

묻는 나는 ‘이게 네 열매니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부터 하지 않았다. 다만 얼마나 속상한지를, 속상해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물었다. 그러다 보니 슬며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열매라는 것을. 이어서 새롭게 알아
차린 부분도 있다. 단지 이 공연의 관객이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빠르게 모이는지가 열매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 마지막에 보이는 속도와 숫자만이 아니라 지난 봄여름 그리고 얼마 전까지 해온 일 모두를 합한 전체를 열매라 할 수 있지않을까. 봄에 나온 앨범, 여름에 한 단독 공연, 이어진 가을 공연까지.

그동안 어떤 때의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그때의 내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스스로를 원망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불안, 초조와 함께 산 지난겨울처럼. 그러나 절기와 계절의 흐름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때마다 어떻게든 자연의 리듬 속에 살고 있는 나라는 작은 존재를 확인하면서 조금씩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의 일부인 존재답게 자연스레 시작하고, 나아가고, 정리하고, 멈출 것이다. 그러다가 마음이 힘들면 나와의 대화도 해보면서. 이제는 겨울나무를 보며 쓸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무는 지금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겨울을 사는 중이다. 우리는 그게 언제든, 지금을, 계절을 살고 있다.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_MUSICIAN 시와 들여다보고 안아주는 음악과 글을 짓는다. ‘노래가 나를 부르고 나는 노래를 부른다’는 에세이 <나는 노래하는 시와로 산다> 속 문장처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오가는 마음과 생각을 글과 음악으로 표현한다. 자연이 그러하듯.

③ 관계를 내려놓는 법

내가 싫어 정리한 관계야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겠지만 인생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도 내쳐질 각오가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미움받을 용기 따위는 없었다. 내가 존경해야 할 사람은 이순신이 아니라 불편한 인간관계를 칼로 무 자르듯 싹둑 잘라내는 사람이어야 했다. 끼고 싶지 않은 단톡 방에서 나갈까 말까 하루 종일 전화기만 노려보다 포기한 밤이 셀 수 없이 많은 나로선 정말 그렇다.

어느 날 동창 한 명이 뉴욕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 떠날 때 연락처를 다 바꿔버린 탓에 내게 연락하기까지 별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아, 그래. 너 오면 근처에 사는 동창들 모아 점심이나 한번 먹자.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거의 20년 만에 보는 것이니 점심 먹는 것 말고 딱히 더 할 일도, 할 말도 없을 듯했다. 하지만 일단 무대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하는 성격상 열심히 입을 털다 보니 시간은 점심때에서 저녁때로 이어졌고, 자리를 마칠 때가 되었는데도 그 동창이 자꾸 미적거렸다. “뉴욕 일정을 워낙 짧게 잡아서 아쉽네. 며칠 더 있다 가고 싶은데. 아, 근데 잘 데가 마땅치 않아서.” 필라델피아, 보스턴, 뉴저지에 사는 동창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며 눈빛을 쏴댔다. 한국에서 온 동창을 재워줄 사람은 너야 너! 피융피융. 나…? 내일 일해야 하는데? “너 일할 동안 난 동네 돌아다니고 있을게.” 브루클린에서 뭘하고 돌아다니려고…? “아, 근데 나 전철 탈 줄도 모르는데. 지도도 볼 줄 모르고.” 결국 나는 동네 친구에게서 이불 등등을 빌려다가 그 동창을 집에 재우고, 며칠 일을 미룬 채 전철을 태워주고 관광지에 데려다주고 밥을 먹이고 불편한 밤들을 보낸 후 돌려보냈다. 이후 며칠간 나 스스로가 짜증스러워 가슴을 치다가 난생처음 단톡 방에서 도망쳐 나오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미움받을 각오를 한 첫 인간관계였다.

얼마 전 출간한 에세이 <마시는 사이> 이야기를 하는 라이브 도중에 ‘뉴욕에 살다 보면 찾아오는 사람도 많을 텐데 불편한 적은 없었나?’라는 질문을 받고 갑자기 그때 일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어차피 착한 편도 아닌데,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인 척하느라 안달이 났던 걸까. 그 자리에서 나는 왜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했나. 동창이 아무리 붙들고 늘어져도 그냥 모른 척하면 될 일이었다. 그를 집에 데려간 것도 나고, 관광지로 모시고 간 것도 나다. 할 짓 다 해놓고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욕먹은 것도 나다. 대체 이게 뭐냐고…?

요즘 내가 챙겨 듣는 인기 팟캐스트 <여둘톡: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는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를 내세우는데, 제발 ‘싫은 걸 싫다고 말하기’도 가르쳐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다. 거절을 못 하는 이놈의 성격은 ‘(엄마한테) 착한 척하는 훈련을 잘 받아서’ 그리고 ‘사람 욕심이 지나쳐서’ 굳어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종종 내게 말한다. “내가 아는 최강의 E야.” “뭔 친구 욕심이 그렇게 많아?” “아니, 뭐 죄다 베프래!”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 그런 게 뭔지 모르지?” 난 허허거리고 실실 웃는다. 여러분, 오해야. 속은 거라고….

나는 사람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해 그들에 관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으며 하고 그러면서 거창하게는 삶의 보람까지 느끼는 쪽인데, 문제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하듯이 열심히 뭔가를 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돌아오는 것은 받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 먹지 않아도 될 욕, 풀기 어려운 오해 등이다. 그걸 알면서도 질질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계기가 필요한 법. 저 일 이후로 단톡 방 몇 개에서 나왔다(남들이 보면 별거 아니겠지만, 나로서는 아주 큰일 한 거다).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을 거절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온갖 변명을 구차하게 덕지덕지 붙이지만). 만나면 즐겁기보다 부담스러운 몇몇 관계는 연락이 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리했다. 머리가 치렁치렁 그게 뭐냐는 둥 네가 입기 좀 그런 옷 아니냐는 둥 살이 쪘니 빠졌니, 얼굴에 뭐 좀 맞아라, 이런 말을 감수해야 하는 관계도 끝냈다. 어차피 그런 말 들어봤자 내가 바꿀 것도아니고, 그냥 너님 외모에 저는 관심 없으니 이만 떠납니다….

내가 싫어 정리한 관계야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인생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도 내쳐질 각오가 필요하다(각오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오래전 실제로 그런 뼈아픈 경험을 하고 그 상처가 꽤 오래간 탓에 아마 내가 사람 관계에 이렇게 전전긍긍하는지도 모른다. 내 베프님이 늘 하는 소리가 있다. ‘내 사람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누군가가 빠져나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고. 그 말이 내 정리를 돕고 있다. 뭐, 채워지지 않으면 어떤가. 이미 내겐 내 분수에 맞지 않게 좋은 사람이 넘치도록 곁에 있다. 쓸데없이 기운 빼면서도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관계를 과감히 치워버리고 새해에는 내 옆에 있는 ‘내 사람들’에게 더 보태서 더 잘하고 싶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괜히 명언이 아니라니까.

_WRITER 이현수 5백여 권의 영화 잡지와 책을만들다 홀연히 뉴욕 브루클린의 삶을 택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함께 마신 술 이야기를 모아 에세이 <마시는0 사이>를펴냈다. 책 제목처럼 마시는 것만큼이나 사이(관계)를 귀히
여기는 삶을 산다.

 

④ 우리들의 Fasting Season

무거운 추가 사라진 듯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몸이 비워지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 사이에는 유행이 있다. 바로 단식(fasting)이다. 우리에게는 매년 단식을 하는 전통이 있다. 딱 해가 바뀔 때 쯤이면 우리는 이렇게 물었다. “할 거지?” 그럼 누가 되었든 고개를 끄덕였고 질문은 이어졌다. “언제?” 단식의 시기는 무척 중요한 문제였다. 한 해 중 가장 깨끗한 시기를 언제 맞을 거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20대 후반에서 기껏해야 30대 초반에 이르는 나와 친구들이 단식이라니, 이게 무슨 속죄일을 맞은 유대인 같은 소린가 싶을 것이다. 종교적 의미와 전혀 관련이 없지만, 신성하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다가올 한 해를 조망하며, 가장 중요한 변곡점의 시기를 단식의 시기로 삼았다. 특히 계절이 중요했다. 먹는 게 없는 사람에게는 계절이 밥상이었다. 봄의 단식은 산뜻하고 여름은 따듯하고 가을은 시원하고 겨울은 상쾌했다. 사계절, 네 가지 맛이었다. 그 시기의 공기와 온도와 빛이 텅 빈 몸을 가득 채웠으니까.

단식은 달라진 몸과 함께 시작되었다. 막 직장 생활에 적응해가던 20대 중반의 어느 날, 처음 보는 현상을 맞닥뜨렸다. 밥만 먹으면 속이 메슥거리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공포스러웠다. 나름대로 내 몸이 예민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적지 않은 세월 동안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혀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처음 마주치는 증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유도, 대처 방법도 알 수 없었다. 몸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역류성 식도염이네, 그거. 원인은 스트레스야.” 그때 우리 팀 팀장님이 증상 몇 가지만 듣고 바로 진단을 내렸다. 놀랍게도 이후에 찾아간 대학병원에서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팀장님은 먼 곳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음, 이제 네 미래를 알려줄게. 다음은 과민대장증후군이랑 대상포진, 위염….” 병명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바로 그녀 자신이 걸어온 길이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이상 피할 수 없어. 즐겨.”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인데, 시간이 갈수록 몸은 병들어 간다고? 그때 나는 먹는 것을 멈추기로 했다. 지금까지 했던 방식으로는 넘을 수 없는 어려움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먹어왔고, 더 잘 먹어왔는데 그걸로 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친구들도 사이좋게 비슷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수년간 쉴 새 없이 일만 한 우리의 몸은 너나없이 한두 군데씩 이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새로운 몸의 언어를 해독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게 단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대장정의 시작이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선배들의 몸이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위기를 맞은 젊은 여자 셋이 단식을 시작했다. 곡기를 끊는 것은 그야말로 복잡한 일이었다. 그런데 곧 먹지 않고도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은 신비를 체험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굶는다고 죽는 게 아니었다. 몸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필수 단위들을 알면 얘기는 달라졌다. 바로 전해질, 포도당, 비타민 C다. 사람의 몸은 늘 적당히 달고 짜야 했으며 어느 정도의 수분과 비타민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먹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적정량으로 챙겨주면 몸을 운용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죽염을 챙겨 먹고, 포도당을 채워주는 효소를 마시고, 비타민 C에 해당하는 감잎차를 적정량 챙겨 마셨다. 아침저녁으로 풍욕을 했고 매일 한 번씩 관장을 하고 냉·온욕을 했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나 아프거나 힘들지 않았다. 먹는 것도 굉장한 노동이었음을 알았다.

며칠이 지나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 몸이 똥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똥배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먹은 건 물하고 소금밖에 없는데, 하루에 화장실을 열 번도 넘게 갔다. 쉴 새 없이 똥이 나왔다. 끝도 없이 나오는 그것을 보며 경이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대체 언제까지 나올 작정인지 궁금했다. 대체 언제부터 내 몸에 있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디톡스라는 말을 시각화했다. 그건 그러니까 그냥 똥을 뺀다는 얘기다. 내 몸은 그야말로 똥 덩어리였다. 장장 25년간 묵은 똥을 품고 있던 몸은 무척이나 무거웠을 것이다. 아주 오래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먹는 걸 쉬어본 적이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쉬어줘야 한다고 말하면서, 먹는 걸 쉰 적은 없었다. 내 몸은 그야말로 25년간 휴일 없이 열려 있는 마트와 똑같았던 셈이다. 갑작스러운 휴무 소식에 몸이 멈춰 섰다. 우리가 미친 듯이 일만 하다가 갑자기 휴일이 오면 뭘 해야 할지 모르듯이.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설마 우리 쉬는 거야?’ 그러다 서서히 활동을 멈췄다. 점차 조용해졌다. 생애 첫 휴무를 맞이하고 있었다. 곧이어 이빨들이 심심해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사라지니, 몸은 오랫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것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 곳곳에 쌓여 있던 찌꺼기들과 작별했다. 며칠은 먹지 않아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가 이미 몸 안에 있었다. 날이 갈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해야 할 일이 줄어드니 잠을 오래 자지 않아도 심신이 상쾌했다. 무거운 추가 사라진 듯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느낌이었다. 몸이 비워지고 있었다.

충분히 비웠으니 이제 잘 채워야 했다. 그 과정은 비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다시 먹는 과정은 몸이 탈이 나지 않도록 긴 호흡으로 상냥하게 진행되었다. 단식을 마치고 처음으로 먹은 샐러드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몸의 모든 감각이 음식의 입장을 환영했다. 샐러드는 원래 이런 맛이라고,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내 몸은 방금 포장을 뜯은 물건처럼 새것이었다. 마음은 가벼워서 통통 튀어 올랐다. 언제든 다시 시작하는 버튼을 손에 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해가 저물어갈 때쯤 서로에게 묻게 되었다. “언제 할까?”

_WRITER 양다솔 수필집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과 독립 출판물 <간지럼 태우기>의 저자이며, <격일간 다솔>의 발행인, ‘까불이 글방’의 지기다. 보다 풍요롭고 건강한 일상을 만들기 위한 방식을 다정한 글로 전파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