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텔라 베르사체는 폐허가 된 듯한 바닷속으로 관객을 초대했다. 부서지고 흐트러진 조각상과 기둥들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흩뿌려놓은 모래 위로 모델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쇼장이 주는 어두운 느낌과 달리 컬렉션은 밝은 색감과 스포티 무드, 현란한 패턴으로 구성됐다. 해조류가 연상되는 러플과 조개껍데기에서 영감 받은 브라톱 등 베르사체가 완성한 해저 세계에는 다채로운 요소가 자리 잡고 있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1992 S/S 컬렉션에서 공개되며 화제를 모은 불가사리 패턴의 부활이다. 스커트와 톱, 재킷과 쇼츠 등 다양한 아이템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등장한 불가사리들은 마치 춤추는 듯 역동적인 분위기를 더하며 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누군가는 미니멀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라고 혹평하겠지만, 고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노력만큼은 어느 쇼와 견주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