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 스펜서
풀 네임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 1961년 7월 1일 영국에서 태어나 1997년 8월 31일 향년 36세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1961년 7월 1일, 노퍽 주에 위치한 왕실 별장 샌드링엄에서 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와 프랜시스 백작부인의 1남 3녀중 넷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먼 조상인 존 처칠의 외손녀 베드퍼드 공작부인 다이애나로부터 따왔으며,형제로는 큰언니 사라, 작은언니 제인, 남동생 찰스가 있다.
다이애나가 6살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으나 양육권 문제로 다시 아버지가 있는 샌드링엄으로 돌아갔고, 14살에 친할아버지 7대 스펜서 백작이 사망해 아버지 존이 백작위를 계승하고 알소프 저택에 입성한다. 이때 작위도 아너러블에서 레이디로 격상되어 ‘레이디 다이애나(Lady Diana)’ 라고 불리게 된다. 어린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것이 인생에 걸쳐 트라우마로 작용했고, 사교계에서 사람들이 어머니에 대해 수근거리는 말을 들어야 했으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계모와의 불화도 심했다.
결혼 전에는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핌리코의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애나는 생계를 위해 일한 게 아니며 짧은 처녀 시절 동안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한 것은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 앤드루 왕자와 소꿉친구라 아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고, 다이애나와 찰스가 서로를 제대로 인지하면서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7세 때의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어갔다. 그러다 3년 뒤인 20세 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시도때도 없이 기자와 파파라치가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왕세자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연애 기간 내내 각종 언론들과 파파라치들이 다이애나에게 열광했다.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이 절정에 달할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이자 장차 미래의 국왕이 될 왕세자가 과연 어떤 여성을 비(妃)로 맞이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국민들은 스펜서 백작 가문의 3녀인 19살의 어린 아가씨 다이애나가 찰스의 신붓감이자 미래의 왕비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알기도 전에 흥분감 속에서 찰스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1981년 2월 24일,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 두사람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다.
5개월 후인 7월 29일 세계인 수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때 다이애나의 나이는 20세였다. 데이비드&엘리자베스 에마누엘 부부가 디자인한 웨딩드레스로 이 드레스는 장식된 수천 개의 진주와 스팽글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7미터의 긴 트레인으로도 유명하며 이후 옅은 아이보리색 웨딩드레스가 화이트를 앞서기 시작했고, 어깨부분의 풍성한 퍼프 슬리브, 긴 트레인은 전세계 여성들의 로망이 되었다.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티아라를 대여하지 않고, 대대로 친정 스펜서 가문에 물려내려오는 티아라를 썼다.
’20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영국의 왕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흥분 속의 세기의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거치며, 다이애나는 ‘결혼식이 끝났으니, 더 이상 언론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했던 그녀의 착각이었다. 파파라치들은 끊임없이,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에 찍혔던 여성 인물(The most photographed woman in the world)이 된다. 실제로 이 말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대중지에서 다이애나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된다. 다이애나는 20세기 통틀어 그 어떤 연예계 스타나 정치인보다도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혔다. 그녀는 말 그대로 파파라치들의 돈줄이었다.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많은 사진이 찍혔으니 말 다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없다.
남편인 찰스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 연인이었다. 카밀라가 이미 앤드류 파커 볼스와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륜은 계속되었다. 남편의 마음이 본인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이애나는, 찰스가 본인과 결혼한 이유가 ‘왕세자비라는 자리에 앉혀놓기 위한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사실 다이애나는 결혼 직전에도 찰스 왕세자가 과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지를 물어보았고, 이에 찰스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찰스는 ‘왕위 계승권’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대중을 눈속임하여 왕세자로서의 인기를 얻으려고, 젊고 아름다운 데다 ‘성공회 신자’인 다이애나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것이다.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결혼한 다이애나의 눈에 찰스의 간통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카밀라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다이애나가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자살 시도에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심신이 지쳐갔다.
다이애나가 15년 간의 왕실 생활을 하며 괴로워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왕족들 때문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제했다. 다이애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른 왕족들은 감성적이고 진심으로 국민들을 대하는 다이애나를 골칫덩어리라고 여겼다. 그들은 외부인 출신 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을 은근히 소외시켰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두 며느리를 번번이 제외시켰다. 후에 다이애나가 1995년, 마틴 배셔와의 인터뷰 도중에 말했듯이, 왕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참거나 혹은 꼭두각시처럼 조용하게 왕세자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그녀를 못마땅했다. 다이애나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통통 튀었고, 자꾸만 왕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녀는 “왕실은 ‘다이애나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왕비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이를 보아 그녀가 왕실 내에서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를 알 수 있다.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실시하고, 다이애나는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다이애나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 왕세자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보란 듯이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이트와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의 연애를 하며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는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다이애나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찰스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당시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설이 조금씩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있었다. 이 때를 틈타 찰스의 귀족 친구들은 마치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망친 주범이 다이애나인 것처럼, 마치 다이애나가 편집증을 앓고 있는 마냥 기사를 내보냈다. 결국 10여년 간 참고 있던 다이애나는 폭발했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한 이유였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그녀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그녀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혼 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11월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와 이혼했다.
‘마마/전하(Her Royal Highness)’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참작하여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이라는 직함은 유지하고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 위자료를 받았다.
찰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콘월 공작 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사실 영국 헌법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의 반대와 국민들의 여론에 밀렸다. 또한 추문을 일으킨 탓인지 왕실은 왕의 배우자(princess consort)를 쓰도록 정했다.
비록 찰스 왕세자의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슬하에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와 해리 왕자를 출산해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한 다이애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아들들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동서고금 어린 왕자와 공주의 양육을 유모에게 맡기는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이례적으로 모유를 먹이며 두 아들을 직접 돌보는 양육법을 고수하였다.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성장한 윌리엄과 해리는 미래의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부각되었으며,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본인이 어렸을 때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자식이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15년 간 지속했다.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서한 뒤 1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선종하여,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다. 왕세자비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로는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관여했던 다양한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운동이었다. 그녀의 사망 직후인 1997년 하순에는 대인지뢰 금지 국제운동 본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열성적이고 진심어린 다이애나의 사회 활동에 전 세계는 감동했고,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당연히 그에 비례해 영국 왕실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다이애나가 이혼한 후 다이애나는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했지만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했다. 이미 영국 왕실과 싸운 적도 있는 다이애나는 참지 않고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파라치 1명을 잡아서 두들겨 패기도 했고, 파파라치의 사진기를 압수하여, ‘마틴’이라는 유명한 영국 파파라치를 300m 안에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접근금지령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 그러자 마틴은 “그까짓 사진 좀 찍히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다이애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처지예요!” 라고 징징거리며 망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진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고, 그녀가 알 파예드와 요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진은 1997년 당시 돈으로 30억원에 팔렸다. 아예 사진과 영상을 조작해서 판매하는 일도 부기지수였다. 다이애나가 애인의 등 위에 타고 말처럼 몰고 다니는 영상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데, 돈을 노린 조작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기까지 했다. 또한 오토바이, 차, 요트, 헬리콥터까지 총동원된 도촬 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운명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에 올라탄 다이애나와 도디 알파예드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다. 벤츠는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의 지하차도 기둥에 충돌하고 만다. 운전사 앙리 폴과 도디 알파예드는 충돌 순간에 즉사했으나, 다이애나는 치명상을 입은 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신속히 구출하여 병원으로 이송하거나 구급대에 신고하기는 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마구 터뜨려댔다. 만약 이 때 파파라치들이 바로 신고를 했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약 20분 후에야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당연히 이들은 과실치사, 사생활 침해, 구조거부죄(선한 사마리아인 법)로 체포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다만 이들은 대부분 무죄를 받았고, 주범 격의 3명에게 상징적인 의미로 1유로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20세에 왕세자비가 되어 15년 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막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6세 71일의 짧은 삶이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
다이애나 스펜서 화보
다이애나 스펜서 마리끌레르 화보
다이애나 스펜서는 “바이크 쇼츠의 귀환 ②스타”의 마리끌레르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