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이별

봄날의 이별

부드러운 바람, 따뜻한 햇살 아래서 더욱 날카로웠던 마지막 기억.

이겨야 사는 남자

회의 때마다 똑 부러지는 말투로 완벽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해내는 A선배에게 자꾸 눈이 가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회사 내에서 정의감이 투철하기로 소문난 데다 윗사람들과 부딪치는 일도 왕왕있는 A와 연애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했지만 나는 적극적으로 대시했고 곧 A의 연인이 됐다. 예상과 달리 A는 여자친구에게 무척 자상한 사람이었는데 딱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그냥 지나칠 줄 모른다는 것. A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쟁하기를 즐겼는데 연인끼리 건강한 토론을 나눌 수 있는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A의 지고는 못 사는 성격 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확실할 때조차 A는 앞서 했던 말을 바꿔가면서까지 자신의 말이 맞다고 우겨댔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A의 집에서 같이 TV를 보는데 <나 혼자 산다>에 승리가 나오고 있었다. 승리에 대한 그의 한 마디가 그날 따라 좀 경솔하고 천박하게 들렸다. 나는 가볍게 “에이, 그건 아니지”라고 말했고 그는 내 말에 반박했다. 둘 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그 순간 승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도지는 저혈압 때문에 어지러워지던 찰나, 나는 거실에 걸려 있던 파카를 집어 들고 A의 집에서 뛰쳐나왔다. 새벽 3시였다. 눈앞에 보이는 택시를 잡아 탄 후 쉽게 진정되지 않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집 앞에서 내렸는데 문득 종아리께에서 묘한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반바지 차림에 파카만 걸치고 쫓기듯 나온 그 상황에서 파카가 답답할 정도로 어느새 훌쩍 다가온 봄이 바람의 질감마저 바꿔놓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이 좋은 날 승리 때문에 헤어졌다는 생각에. S( 브랜드 기획팀, 32세)

 

진해 혼자 가도 되나요

결혼을 한 달 앞두고 파혼한 B는 극심한 마음고생으로 살이 쪽 빠졌다. 나를 포함해 친구들과 지인들이 마음을 모아 B를 도왔고 몇 개월 후 B는 선배의 소개로 괜찮
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반가운 소식을 보내왔다. 유명한 게임 회사에서 게임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는 그를 처음 본 건 우리의 연말 모임. 망설임 없이 꽤 비싼 식사 비용을 지불하고 나가는 그의 훤칠한 뒷모습 뒤로 친구들끼리 무언의 긍정적인 눈빛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B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아주 깨가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만난 지 50일이 된 기념으로 회사로 케이크를 보내고 노트북 속도가 느리다는 B의 투덜거림에 바로 다음 날 최신형 노트북을 사다 주는 이런 남자를 30대 중반에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더더욱 내 눈을 의심했다. ‘틴더’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모임의 다른 친구에게 그의 사진을 캡처해서 보냈다. 그 친구 역시 경악한 건 마찬가지. 닮은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엔 눈 밑에 난 점까지 너무 똑같았다. B에게 이 사실을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끝에 우리는 B를 만나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털어놓았다. B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전화해 사실관계를 확인했고 사실로 밝혀지자마자 온갖 육두문자를 날린 후 단번에 관계를 정리했다. 우리는 그대로 근처 횟집으로 가 소주를 진탕 마셨다. 바쁘게 서로의 잔을 채우는 와중에 B가 문득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해에 왕벚꽃 보러 가고 싶었는데!” 몇 달 전부터 생전 가볼 생각도 없던 진해 군항제에 어째서인지 가고 싶어져서 진해 벚꽃 열차를 예약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남자와 B의 시간이 맞는 때가 4월에 딱 한 주밖에 없어서 웃돈까지 주고 구한 티켓이라고 했다. 환불하겠다, 중고나라에 올리겠다 난리를 치던 B는 며칠 후 단톡방에서 군항제에 혼자 다녀올 예정이라고 웃음기 빼고 선포했다. 이제 결혼 따위에 목매지 않고 혼자인 시간을 즐기고 싶다며. 우리는 전부 B의 ‘현자 타임’을 응원하고 있다. N( 홍보 대행사 근무, 33세)

 

환승의 정석

E는 궁금해했다. 남들은 잘만 하는 연애가 왜 내겐 이렇게 어려울까. 여성적 자신감이 바닥을 칠 무렵 친구의 소개로 만난 C. 이상하게 이 남자와는 탁구공 주고받듯 연락이 이어졌다. 세 살 터울의 경상도 남자인 C는 다정하지는 않았지만 E를 사랑해주었고 그렇게 어느새 4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E는 회사원이, C는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 되었다. 시험에서 번번이 아쉽게 미끄러진 C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계속 다음 시험을 준비했다. 자연스럽게 둘은 서울 끄트머리에 간신히 자리한 C의 자취방에서 데이트를 주로 했고, ‘추리닝’과 후드 티셔츠 차림일 때가 많았다. 데이트 비용은 대부분 돈을 벌고 있는 E가 충당했다.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가끔 E는 룸메이트인 내가 남자친구에게 크고 작은 선물이나 이벤트를 받는 날이면 ‘부럽다’는 말을 연발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C와 통화하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회계사가 되어 있을 C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참을 만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 C는 떨어졌다. 이번에도 아깝게. 멘탈이 완전히 나가 있는 C를 위로하는 동안 긴 설 연휴가 찾아왔고 둘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E가 데이팅 앱을 깐 건 정말 본인의 말대로 긴 연휴 동안 C에게 단 두 번의 카톡만 왔기 때문일까? E는 그 앱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됐고 그의 말투, 영화 취향, 적당한 장난기 모든 것에 푹 빠져버렸다. 둘은 연휴가 끝나기 무섭게 만났고 이상 기온으로 부쩍 따뜻해진 날씨는 설렘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E는 약간의 죄책감과 큰 후련함을 느끼며 C에게 이별을 고했다. C는 예상한 듯 담담했다고 한다. 정확히 이틀 뒤 데이팅 앱에서 만난 남자와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E의 손에는 봄을 알리는 분홍빛 튤립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C를 만나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E의 옷장에는 두꺼운 후드 티셔츠 대신 하늘거리는 하얀 원피스가 걸려 있다. 누가 E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K( 약사,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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