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등장한 순간부터 기업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디지털화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그 결과 우리는 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디지털 방식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해졌다.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울 것 없이 삶 곳곳에 포진하게 된 것이다. 패션계 역시 이런 흐름에 발을 맞췄다. 요즘 세대의 시선으로는 인터넷이라는 게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이베이 등을 통해 e-커머스를 시작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꼽히던 메이시스가 디지털 경쟁에서 패배를 예감하며 1백여 개의 지점을 폐쇄한 일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표적인 미국 브랜드 랄프 로 렌의 CEO는 일명 ‘Z세대’의 시선을 끌기 위해 디지털 언어로 메시지 를 전개하겠다는 입장을 대대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공급의 영역에서 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하이패션계가 추구하는 미감 자체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대다수 하우스 브랜드가 장인정신과 클래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번 시즌에 벌어진 다양 한 해프닝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패션계가 드디어 공고했던 아날로그적 예술 세계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했 기 때문이다. 루이 비통이 지난달 프랑스 최대의 혁신 기술 컨퍼런스인 비바 테크놀로지에서 공개한 두 가지 제품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 백은 플렉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 는 기업 로욜(Royole)의 도움으로 만들어졌으며, 섬유 광학 기술을 이용해 무지개 색상으로 빛나는 제품을 선보인 지난겨울 남성 컬렉션 에 비해 확연히 발전한 인상을 준다. 루이 비통은 앞서 ‘미래로부터 온 엽서’라는 테마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쇼윈도를 구상해 디지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계속해서 멀어지는 배경 안에 수동적이지 않은 포즈의 마네킹을 배치한 쇼윈도는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에서 지금의 결정 하나가 미래의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로도 화 제를 모았다. 메종 마르지엘라도 S/S 시즌 제 품에 디스플레이를 더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백팩은 별도의 기계를 넣어 재생되는 채로 연출할 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루이 비통 과 달리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제품을 통해 디지털 노마드를 패션계로 끌어들이고자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변화는 패션을 보여주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지난 시즌 발맹은 ‘슈두’를 포함한 3명(?)의 아바타 모델을 광고 캠페인에 등장시키며 눈길을 끌었다. 이를 기점으로 가 상 인물들이 활동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고, 릴 미켈라(@lilmiquela) 와 누누리(@noonoouri) 등의 가상 모델 겸 인플루언서는 말 그대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들은 패션 브랜드의 신제품을 입은 채 컬렉션에 참석하거나 화보를 찍고,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하며 도시 곳곳을 누 빈다. 중요한 건 이들의 행보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며, 실제 모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아직은 낯설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적어도 패션 분야에 한정해서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수닐 굽타가 자 신의 저서 <루이비통도 넷플릭스처럼>에서(물론 패션의 예술 세계 가 아니라 비즈니스 생태계의 전략을 분석한 것이지만) “디지털 기술 이 전통적인 선도 기업들의 지위를 위협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 게 무궁무진한 기회를 열어주기도 한다”고 언급했듯, 패션계에 불어 닥친 변화의 바람은 도태되면 무너지고, 편승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위협이자 기회가 됐다. 영민한 소비자라면 느긋한 태도로 결과를 지켜 보길. 클래식으로의 회귀 혹은 디지털 세계로의 편입, 어느 쪽이건 21 세기의 디지털 경쟁이 침체한 패션계에 신선한 자극을 줄 거라는 점만큼은 자명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