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션계는 종종 판타지에 도취된다. 그리고 그 판타지와 보통의 삶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괴리가 생긴다. 엄청난 부피의 드레스와 빛을 반사하는 디스코 팬츠처럼 보기에는 좋지만 입을 수는 없는 옷들이 매 시즌 이 환상의 나라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파자마 트렌드 역시 그렇다. 단정한 셔츠에 잠옷에서 본뜬 파이핑 디테일을 더한 정도라 거리감이 없던 파자마 룩은 어느새 진화하고 진화해 쿠튀르라는 신세계에 안착했다. 온통 레이스로 이루어진 슬립 드레스나 고전 영화에 등장할 법한 로브, 로코코 시대의 공주 잠옷을 연상시키는 드레스와 가죽, 실크, 시폰 소재의 파자마 수트를 필두로 하는 진화한 파자마 룩은 이제 ‘쿠튀르 파자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새 시즌 쿠튀르 파자마라는 주제를 가장 잘 보여준 브랜드는 피터 필로토와 랑방, 시스 마잔이다. 피터 필로토는 광택 있는 소재를 중점적으로 사용해 정석이라 할 만한 로브를 완성해냈고, 랑방과 시스 마잔은 슬립 드레스에 레이스를 장식해 진짜 잠옷처럼 보이는 룩을 여러 벌 선보였다. 반면 알렉산더 왕은 전신을 레이스로 감싸는 보디수트로 시선을 모았으며, 마크 제이콥스는 풍성한 볼륨과 이불 같은 패턴을 활용해 파자마 무드를 이끌어냈다.

이토록 섬세한 룩을 볼 때면 실용성에 관한 논의를 잠시 접어두고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멋진 옷이라 해도 여러 사람이 자주 입고 탐내며 재생산하지 않으면 사장되고 마는 것이 트렌드의 섭리다. 쿠튀르 파자마의 한계 역시 여기에 있다. 벨라 하디드, 비욘세, 두아 리파, 에밀리 라타코브스키 등의 셀러브리티부터 패션쇼 시즌이면 파리와 밀라노, 런던과 뉴욕으로 몰려드는 패션 인사이더들까지, 유행이라면 거부하는 법 없는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준 덕에 아직까지 연명하고 있지만 벗은것과 다름없어 보이는 슬립 드레스나 레이스 보디수트가 현실 세계에 얼마나 유효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