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실용주의의 시대다. 심미적인 부분에 두었던 가치를 편하고, 폭넓게 활용 가능한 것으로 옮겨왔다는 뜻이다. 영원히 아방가르드할 것 같던 하이패션계도 시대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몇 시즌째 아찔한 스틸레토 힐보다 납작한 굽의 샌들이, 인형 옷처럼 몸을 꽉 죄던 드레스 대신 낙낙한 팬츠가 런웨이를 메우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슬링(sling) 트렌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보디콘셔스 실루엣의 불편함과 오버사이즈 실루엣의 거추장스러움, 둘 중 어느 쪽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대안을 제시하며 단숨에 대체 불가능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골반에 살짝 걸쳐 입은 팬츠, 제 사이즈보다 약간 큰 느낌의 코트, 발목 부분을 묶어 헐렁한 실루엣을 강조한 팬츠처럼 긴장감과 여유 사이를 오가는 디테일이 극과 극의 실루엣 사이에서 유독 쿨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사실 슬링은 설명하기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다. 슬링 백이야 이미 몇 시즌째 유행하며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지만, 옷은 ‘도대체 느슨하다는 게 어느 정도야?’라는 의문을 품게 만드니 말이다. 먼저 슬링을 하이패션계로 불러들인 보테가 베네타와 JW 앤더슨의 쇼를 예로 들어보자. 보테가 베네타는 소매길이 와 전체 길이 모두 기본적인 테일러드 코트보다 살짝 긴 코트를 선보였고, 허리 벨트까지 헐렁하게 묶으며 슬링한 스타일링을 완성했다. 반면 JW 앤더슨은 바지 밑단을 살짝 묶어 대비를 이루게 함으로써 다른 부분의 낙낙한 형태를 강조했다. 광택이 돋 보이는 로샤스의 팬츠와 랑방의 구조적인 데님 팬츠, 넉넉하다 못해 남의 바지를 빌려 입은 듯 보이는 사카이의 와이드 팬츠처럼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디자인으로 슬링을 구현한 브랜드도 적지 않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다. 달리 해석하자면 급박하게 돌아가는 패션계에 낯선 것이 끼어들 틈이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하다. 그렇기에 이름마저 생소한 슬링의 등장 역시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두고 보길.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고 모호하며 오묘한, 그러나 입을수록 편안하고 포근한 이 실루엣은 디자인만큼이나 분명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속도로 일상에 뿌리내릴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