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렌드 컬렉티브의 캠페인 이미지.

 

웃지 못할 신조어가 등장했다. ‘뼈말라 인간’과 ‘개말라 인간’이다. 어원을 추측하기조차 쉽지 않은 두 용어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몸을 가진 사람을 이른다. 10대들이 저체중의 몸을 선망하면서 생긴 단어다.

이러한 용어의 탄생에는 하이패션도 큰 몫을 보탰다. 움푹 파인 볼과 드러난 갈비뼈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톱 모델의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이 이런 신체를 가지기 위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어떤 사회적 폭력을 감내했는지 알 리 없는 청소년들은 런웨이의 빛나는 단면만을 이유로 모델을 동경하게 됐고, 그렇게 44 사이즈는 일종의 판타지가 됐다. 헬가 디트마르, 엠마 홀리웰, 수잔 아이브가 2006년 발표한 논문*에 실린 실험에 따르면 바비 인형을 보고 자란 어린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실험 속 바비를 살아 움직이는 모델로, 미디어에 등장하는 완벽한 비율의 셀러브리티로, 비현실적인 게임 캐릭터로 치환해본다면 디지털 매체에 익숙한 MZ 세대가 뼈말라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이 사회가 야기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바비 인형이 여자아이들에게 날씬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가?(DOES BARBIE MAKE GIRLS WANT TO BE THIN? THE EFFECT OF EXPERIMENTAL EXPOSURE TO IMAGES OF DOLLS ON THE BODY IMAGE OF 5 TO 8-YEAROLD GIRLS, DEV PSYCHOL, 2006)

몇 해 전, 패션계에는 이미 한차례 자정 바람이 불었다. 거식증을 앓다 생을 마감한 모델들의 인권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지나치게 마른 모델의 기용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고, 런웨이에는 플러스 사이즈라는 수식어를 단 모델들이 등장했다. 이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취지의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e)’를 내세우는 브랜드가 대거 등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추측건대 브랜드 철학쯤이야 ‘행동주의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 정도로 여기며 이후에 대두한 여성주의나 지속 가능성 같은 화두를 따라가기 바빴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이토록 무자비한 뼈말라 인간의 시대에도 여전히 묵묵하게 자기 몸 긍정주의를 설파하는 이들이 있다. 먼저 해외에 기반을 둔 다수의 속옷과 운동복 브랜드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룰루레몬 출신의 디자이너가 설립한 걸프렌드 컬렉티브(Girlfriend Collective)가 대표적이다. 지속 가능성부터 여성 인권과 흑인 인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치를 위해 목소리를 내온 이 브랜드는 제품을 XXS부터 6XL까지 폭넓은 사이즈로 출시하며, 인종과 체형에 관계없이 각양각색 모델을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캠페인 속 모델들은 국내 운동복 브랜드에서 흔히 내세우는 섹슈얼한 포즈 대신 경쾌한 표정과 포즈로 브랜드의 선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힌디어로 초록을 뜻하며, 인간의 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제고하기 위해 설립했다는 브랜드 하라(Hara) 역시 주목할 만하다. 하라의 공식 인스타그램(@hara_thelabel)은 팔로어들의 몸에 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한다. “사춘기 때부터 내 허벅지 안쪽은 새까맣고 여드름투성이었어. 그런데 나 말고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더라고. 변색도, 돌기도, 자국도 다 정상적인 것 아니야?”, “나처럼 배꼽 털을 사랑하는 사람 있어? 손들어보자!”처럼 몸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시각을 공유하고 있노라면 미적 강박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또한 여성 운동선수가 론칭한 브랜드 졸린(Jolyn)은 장애를 가진 일반인 여성을 종종 모델로 기용하며 다양성과 보디 포지티브를 지향하는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이 밖에도 에트로펜디,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 다수의 하우스 브랜드는 계속해서 런웨이에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등장시키며 하이패션이 44 사이즈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자기 몸 긍정주의 모델인 뇸 니콜라스 윌리엄스.

인스타그램의 누드 사진 정책을 바꾼 모델 에남 아시아마.

가수 마돈나와 그의 딸 루데스 레온.

말과 행동으로 자기 몸 긍정주의를 직접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델인 뇸 니콜라스 윌리엄스(Nyome Nicholas-Williams)는 자신이 모델로 나선 예술 사진이 인스타그램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했음에도 거듭 제재를 받은 일을 지적하며 “왜 항상 몸집이 큰 흑인 여성은 검열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그저 모든 체형을 ‘정상’으로 인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게시물은 곧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결국 인스타그램의 누드 사진 정책을 바꾸어 놓았다. 모델 에남 아시아마(Enam Asiama) 역시 대표적인 자기 몸 긍정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체구가 큰 여성들에 대한 글을 포스팅하며 <버슬(Bustle)>이 소개한 ‘팔로잉 해야 할 영국 페미니스트 11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마돈나의 딸 루데스 레온(Lourdes Leon)은 각종 광고와 SNS 게시물에 체모를 드러냄으로써 어려서부터 겨드랑이 털과 다리 털을 제모하도록 교육받아온 전 세계 여성들에게 ‘자연스러움’의 정의에 대해 시사했다.

 

가수 리조.

그러나 자기 몸 긍정주의 담론에도 우려는 따른다.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평생에 걸쳐 누군가의 몸, 특히 여성의 몸을 아름다워야 하는 객체로 인식해온 바, 자기 몸 긍정주의가 ‘모든 여자의 몸은 아름답고 섹시하다’는 식의 또 다른 여성 대상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맹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보디 포지티브 운동의 선구자격인 가수 리조(Lizzo) 역시 최근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자기 몸 긍정주의가 아닌 자기 몸 중립주의(Body Neutrality)로 재정의했다. 자기 몸 긍정주의라는 단어가 변질됐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실제로 인스타그램에 #bodypositive를 검색하면 사회적으로 학습된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여성들의 나체 사진과 어떤 사이즈의 여성이든 섹시해질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브랜드의 선정적인 광고성 이미지가 과반수를 차지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처음의 의미는 지워지고 또다시 타인의 평가라는 굴레 속으로 여성을 밀어 넣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자기 몸 긍정주의는 더 활발하게 논의되어야한다.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확대되며 더 많은 사람을 위한 방향으로 정립돼야 한다. 그 결과는 리조의 의견처럼 신체 중립주의(신체가 정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자는 개념의 철학)가 될 수도, 완전히 다른 신생 이론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수십 년간 우리를 옥죄어온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디 포지티브는 꼭 거쳐야 할 관문이다. 어쩔 수 없이 코르셋을 재생산하며 누군가에게 유해한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패션 매거진과 뼈말라 인간 시대의 도래에 빚진 패션계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