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부모님의 장례를 치루고 외삼촌 집으로 온 ‘춘희’(박혜진)는 눈알만 굴리기 바쁘다. 당장 춘희를 어느 방에서 지내게 할지 결정하는 데에 식구들 사이로 묘한 신경전이 인다. 호의인 듯 말끝을 올리는 부드러운 어투 속에서 모두가 춘희를 거부한다. 카메라는 춘희의 텅 빈 손을 비춘다. 그러나 춘희의 손은 비어있지 않다. 땀이 가득 차서 넘쳐흐르고 있다.

최진영 감독의 첫 장편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는 ‘춘희’의 이야기다. 춘희의 손과 발에서는 언제나 많은 땀이 난다. 신발 벗고 걸은 자리엔 투명한 물자국이 남고 누군가와 손을 잡으면 타인은 언제나 불쾌감을 느끼며 손을 뺀다. 이 불쾌감은 일차원적으로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자의가 아님에도 죄책감 느끼게 한다. 나는 손을 내미는 대신 숨기는 것이 익숙한 사람,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오직 손, 그 안의 땀만을 의식하는 사람이 된다. 때문에 춘희는 혼자서 잘 지낸다. 누굴 원망하기 이전에 그들의 불쾌감을 먼저 생각하며 멀찍이 떨어진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놀이공원도 가고 노래방에서도 잘 논다. 대신 아무도 없을 때 드럼통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손을 뻗는다.

성인이 되어 다한증 수술을 목표로 마늘을 까며 씩씩하게 사는 춘희(강진아)는 비 오는 날 벼락 맞고 깨어난 후부터 어린 춘희가 눈에 보인다. 집 안 어디에서나 불현듯 나타나 천연덕스레 존재하는 어린 춘희는 잊고 묻고 잘 ‘생존’하려 애쓰는 춘희에게 자꾸만 과거를 들춘다. 비슷한 시기에 말 더듬는 남자 ‘주황’(홍상표)을 만나고 춘희와 주황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유일한 타인이 된다. 그러나 과거와 사랑은 나를 나로 있지 않게 한다. 나를 파헤치고 침투해 보고싶지 않았던, 잘 감추어둔 나를 끄집어낸다. 자신을 덮치는 다면적인 혼란 속에서 춘희는 다시금 성장통을 겪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의 사연 속에서 낡고 지쳐있다. 무엇이든 성취해서 잘 사는 사람들 말고, 잘 안되고 맘처럼 안 풀리고 그래서 행복이 멀리 있는 사람들이다. 그건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노력을 덜했기 때문도 아니다. 애초부터 기울어져서 좁고 궁지에 몰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최진영 감독은 카메라를 비춘다. 과거와 현재의 춘희가 교차되는 판타지적 요소와 곳곳에서 반짝이는 유머, 그 시절의 음악이 적재적소에 쓰여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 춘희를 지켜보고 사랑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드럼통 화염 속으로 손을 뻗는 어린 춘희의 손을 낚아채는 건 어른 춘희다. 오직 나에게만 화를 낼 수 있었던 춘희는 그렇게 어린 날의 나를 보호하고,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을 건넨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괜찮지 않은데 괜찮으려 했던, 괜찮아야 했던 나를 돌려세워 빈 틈 없이 단단한 위로를 건넨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지금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