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킷과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니트 스웨터 산드로 옴므(Sandro Homme), 팬츠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촬영 오기 전 <환혼> 메이킹 필름을 봤다. 현장에서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농담하고 웃다가 슛을 외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더라. 그 영상에 댓글이 수백 개 달린 걸 알고 있나? 아무래도 순간적인 집중력이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서 연기가 힘들기도 하다. 감정을 잡겠다고 현장에서 말 한마디 없이 고립을 자처하는 건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현장도 결국 내 생활의 일부고, 나 역시 밝은 분위기의 현장을 좋아한다. 배우로서 할 일을 챙기면서도, 촬영 외적으로도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

순간적인 몰입은 훈련의 결과인가? 훈련보다는 ‘이번 한 번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다. 주어진 테이크 안에서 ‘장욱’이라는 인물을 잘 전달해야 하는 건 이재욱이라는 배우가 할 일인데, 분위기에 휩쓸려 중심을 잃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니까.

현장을 벗어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배우라는 직업의 속성은 연기 외의 실제 삶에도 영향을 줄 것 같다.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이렇게 후회가 많이 남는 직업이 또 있을까’다. 촬영 때마다 갖가지 후회가 남으니까. 하지만 집에 돌아가 땅을 치고 후회한들 이미 지나간 장면이지 않나. 잦은 후회 속에 살면서 끝내 만족할 수 없다는 이 일의 속성이 자극을 주고, 때로 동력이 된다. 다음을 기약하며 무언가를 계속 갈구하게 하고.

누구에게나 삶은 ‘오늘, 이 순간’뿐이다. 이렇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도지금, 이 순간에만 가능한 일이지 않나. 하지만 반복되는 매일 속에서 우리는 삶이 유한하다는 것, 인생의 순간은 모두에게 단 한 번 주어진다는 절대적이고 공평한 진리를 자주 망각한다. 반면에 배우는 연기를 통해 이 자명한 사실을 자주 깨닫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맞다. 결국, 지금 오늘 이 순간을 잘 살아내고, 살아냄을 지속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어제에 머물지도, 내일에 먼저 가 살지도 않으며 오늘에 집중하기 위해 고민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고루 써야 하는 것 같다. 채찍질만 하다 보면 반복되는 후회 속에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어느 순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든다. 채찍이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그 강도가 점점 세지다 보면 결국 내가 닳게 된다. 그래서 외부의 칭찬도 달게 들으려 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웃음)

스스로도 칭찬을 듬뿍 하고 있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웃음) 현장에서 오늘은 괜찮았다고 하니까, 감독님이 오케이 했으니까 ‘그래, 오케이’ 하고 넘긴다. 감독님의 오케이 소리는 매번 다르다. ‘아… 오케이…’가 있고, ‘오케이!!’가 있다. 내 쪽에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감독님의 오케이 톤이 명쾌하면 받아들인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믿음 외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어디서 찾나? 스스로 내 안에서 믿음을 찾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항상 긴장 속에 산다. 바들 바들 떨면서.

왜 흔히 배우는 자기 연기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완벽했다고 단언하기에는 후회스럽다는 거다. 결과적으로 보면 후회지만, 중간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의심을 거듭하며 마음이 복잡한 상태로 시간을 보낸다. 확고한 믿음을 갖기보다는 하루하루 달리 펼쳐지는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웃음) 매일 주어지는 현장은 물론 내 상태도 매 순간 다른 상황 속에서 절대적인 믿음을 지키기는 어렵다. 하다못해 늘 잘되던 발음도 어떤 날엔 계속 입 속에서 걸린다. 외부적인 변수도 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기를 했다 해도 소품이 알맞지 않을 때가 있는가하면, 조명이나 앵글이 극의 흐름에서 벗어날 때도 있다. 그럴때는 내 연기의 만족도와 별개로 연출자에게는 아쉬운 컷이 되는 거다. 그렇다고 편집된 내용에 대해 ‘아, 그때 내 연기는 좋았는데’ 하며 아쉬워하는 건 미성숙한 태도인 것 같다. 막연한 믿음에 기대기보다 불확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치로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슬리브리스 톱 코스(COS), 재킷과 팬츠 모두 자크뮈스 바이 지스트리트 494 옴므(Jacquemus by G.street 494 Homme), 슈즈 르메르(Lemaire).

재킷과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큰 깨달음을 얻은 자의 최후 진술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환혼>은 장욱을 중심으로 한 성장담이고, 그 성장 과정을 직접 겪어내는 과정에서 깨달은 점도 있을 것 같다. 장욱처럼 무언가 한 가지를 집요하고 지독하게 해봤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런 적은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장욱만큼 절박하게 무언가를 시도하고 성취감을 크게 느껴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장욱을 연기하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이 굉장히 많았다. 연기하는 순간적인 감정 속에서 벅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벅차다’라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알게 됐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부터 <환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작품에 임하며 다양한 삶을 지나왔다. 그 과정에서 덧입혀지거나 빠져나간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드라마 <환혼> 덕분에 덜어낸 건 있다. <환혼>을 촬영하기 전 공백기가 길었는데 그 시간 동안 배우로서 뒤처지고 소외된다는 불안을 느꼈었다. 한데 지나고 돌아보니 나만 불안했었구나 하는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때의 빈 시간들이 내게 터닝 포인트가 됐다. <환혼>은 불안과 결핍을 해소해준 작품이자 이전의 고민들로 부터 나를 꺼내준 작품이다. ‘내가 이렇게 결핍이 많구나’, ‘불안한 감정을 많이 느끼고 있구나’ 하고 인지함으로써 벗어낸 감정들이 있다. 세상이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전까지는 뾰루지 하나만 나도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런데 막상 메이크업을 하는 분은 ‘어? 뭐가 났네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가려주지 않나. 스트레스는 어떤 강박에서 시작되는 건데, 그런 면에서 이전보다는 가벼워지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요즘은 편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환혼>이 큰 역할을 했다.

인터뷰에 앞서 진행한 영상 콘텐츠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금의 대답과 일맥상통한다. 좋은 말인 것 같다.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있고, 시간은 흐르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감을 알기에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분명하고 선명한 이미지 때문일까? 불안을 느낄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고, 내 마음 상태만 고치면 되는 일이라 굳이 표현하지는 않는다. 당시에는 크게 다가오는 일도, 지나고 보면 의외로 단순한 일인 적도 많다. 별일 아닌 걸 나 스스로 복잡하게 꼬다 보니 어느 순간 실타래처럼 엉켜 있더라. 그걸 깨달은 순간 내가 스스로를 환기시켜준 적이 없는 건 아닐까 싶었다. 계속 집에서 고민하고, 대본만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를 밖으로 좀 내보냈다. 지금도 가끔은 휴대폰도 안 들고 밖으로 나가 걷는다. 모든 것을 온전히 나에게 양보하는 거다. 나의 몸과 정신을 우선으로 하는 시간을 늘리다 보니 ‘지금 뭐 하고 있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덜어지더라. 긍정적인 건 앞으로 이런 해소 방법을 더 찾아갈 거라는 거다.

변화 속에서 배우고 고쳐야 할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붙잡고 있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럼에도 매 순간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은 잃고 싶지 않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라는 말을 좋아한다. 늘 이 다짐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마음가짐은 절대 바꾸고 싶지 않다. 즐거운 현장,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인 호흡을 나누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내가 더 노력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