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어둠 속 스크린을 마주할 때 세상의 소란함과는 무관한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처럼 영화제의 시간은 달리 흐른다. 지난 제11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는 같은 것을 보고 감탄하고 황홀해하던 무언의 공기가, 언제까지고 계속 듣고 싶던 이야기가 있었다. 패션 매거진으로는 유일하게 자력으로 11년 동안 자체 영화제를 열어온 마리끌레르 영화제. 그곳에서 보낸 3일.

제11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동분서주하던 때에 대한극장의 폐업 소식을 마주했다. 1958년 개관해 66년을 한자리에 머물며 꽃피웠던 한국 영화의 빛나던 한 시절이, 그 중심이던 충무로의 상징이 끝을 고했다. 며칠 차이로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4>의 흥행 스코어는 올림픽 경기 중계되듯 매일 경신됐다. 영화에 대한 호오는 차치하고, 드넓은 영화관에 단 하나의 영화만이 무수히 재생되고, 홀로 생존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명한 비극임에 틀림없다. 슬픔인지 회한인지 감정을 분별할 새 없이 삶의 큰 지분을 차지하던 중요한 한 시절과 이별 하고 있다는 감각만이 뚜렷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 양극화는 대한민국 영화계, 영화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40여 개 영화제에 대 한 정부 지원은 올해 4분의 1로 줄었고, 그 액수도 감축됐다. 패션 매거진으로는 유일하게 자력으로 11년 동안 자체 영화제를 열어온 마리끌레르 영화제에게도 영화관의 고투는 새로운 난관이었다.

난관을 헤칠 해법은 단출했다. ‘좋은 영화로 양질의 교감을 나누는 것이 영화제의 존재 이유’라는 명제만을 붙들었다. 세계 영화제에서 호평받은 미개봉 국내외 작품을 상영하며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온 영화제인만큼 올해는 어느 해보다 내실을 기하고자 했다. 성대한 개막식도 다음을 기약했다. 스케일에 골몰하지 않고, 시대와 장르, 세대와 성별을 넘어 어느 해보다 충실하게 다르고 다양한 이야기들 을 한 바구니에 담고자 했다. 그렇게 열다섯 편의 영화가 모여 4월 26일부터 28일까지 CGV 용산아이파크몰과 CGV 씨네드쉐프 용산아 이파크몰에서 관객을 만났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부인이었던 프리실라 볼리외의 삶을 내밀하게 그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프리실라> 가 개막작으로 국내 첫 상영을 했다. 제7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부문에 올랐던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 제49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5개 부문을 수상하며 화제가 된 토머스 카일리 감독의 <애니멀 킹덤> 등이 주요 작품으로 선정됐다. 4월 15일 티켓 오픈이 시 작됐고, 총 22회 차의 영화 중 18회 차가 매진됐으며, 나머지 4회 차 역시 소수의 좌석만을 남겼다.

영화제가 열린 3일 동안 가장 많은 웃음과 눈물, 박수가 쏟아진 순간은 다큐멘터리 <그녀들이 행복한 그날까지>의 GV(관객과의 대화) 현장이었다. <그녀들이 행복한 그날까지>는 지난 3월 <마리끌레르>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진행한 제주 해녀 화보 인터뷰 ‘HUE OF HUG’의 진행 과정을 담은 영상 필름으로 온전히 자신의 노동으로 생을 꾸려낸 여성 자립 공동체 해녀의 삶에 존경을 표하며 그들의 삶을 밝고 따뜻하게 담아낸 프로젝트다. 상영을 앞두고 2백여 명의 패션, 뷰티 브랜드 관계자와 영화인들이 객석을 가득 채웠다. 이어 <마리끌레르> 코리아 박연경 편집장, 유선애 피처 디렉터, 김영우 수석 프로그래머가 무대에 올라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 영상을 통해 나누 고 싶은 것에 대한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칼럼니스트 황선우의 진행으로 프로젝트에 함께한 김옥자, 이순덕, 김은주 해녀와 프로듀서 와 이진(Y.ZIN), 촬영감독 이강빈의 대화가 펼쳐졌다.

“우리가 (이 영상 속) 해녀 할머니입니다. 우리가 장한 것 같고, 여러분한테 자랑거리를 보여줘서 흐뭇합니다.” 김옥자 해녀

“자랑거리로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물질하는 걸 처음에는 창피해했지만 물질을 배운 것이 잘한 일 같아 진짜로 행복합니다.” _이순덕 해녀

팔순의 현역 김옥자, 이순덕 해녀는 차례로 소감을 남겼다. “우리가 (이 영상 속) 해녀 할머니입니다. 우리가 장한 것 같고, 여러분한테 자랑거리를 보여줘서 흐뭇합니다.” “자랑거리로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물질하는 걸 처음에는 창피해했지만 물질을 배운 것이 잘한 일 같아 진짜로 행복합니다.” 이들이 이룩한 70여 년의 노동에 대한 존경과 찬사를 나누는 사이 2백여 명의 사람들 마음 한편에 따뜻한 용기가 채워졌다. 이날의 대화는 김옥자 해녀의 노래로 마무리됐다. 아이를 낳고 물질을 하며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당시, 직접 가사와 음을 붙여 스스로를 위무하던 노래였다. 삶의 애환을 눌러 담은 곡진한 목소리는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깊이 가닿았다.

왼쪽부터ㅣ촬영감독 이강빈, 프로듀서 와이진(Y.ZIN), 해녀 이은주·이순덕·강옥자, 모더레이터 황선우

“해녀분들은 바다에서 실종돼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해경과 해군들이 GPS 차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 해녀분들에게도 테왁(해녀들이 물에 뜨기 위해 타는 도구)에 GPS를 달아드리고 싶어 이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왔습니다. 모든 해녀분들이 GPS를 갖는 그날까지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_ 와이진(Y.ZIN) 감독

마리끌레르 영화제 정체성의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어느 영화제에서도 성사된 적 없는 새로운 구성의 GV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지평을 넓힌 장재현 감독의 <파묘>를 상영하고, 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장재현 감독, 김고은 배우가 무대에 올랐다. <파 묘>가 상영되던 당시 차기작 촬영 스케줄로 대다수 GV에 참여하지 못한 김고은 배우가 함께하는 자리였기에 어느 프로그램보다 티케팅 이 치열했다. GV에 앞서 장재현 감독이 나서 김고은 배우에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온 배우에게 전하는 ‘파이오니아상’을 시상했다.

왼쪽부터 ㅣ 감독 장재현, 배우 김고은, 모더레이터 백은하.

“감독님과 처음 미팅할 때가 기억나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큰 사랑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파묘> 현장은 영화 내용과 다르게 밝고 웃음도 많았어요. 행복하게 치열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시간을 관객들이 알아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좋은 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_ 김고은 배우

재킷, 스커트 모두 CHANEL. 이어링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마지막 편집 때 김고은 배우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화가) 재미있냐는 물음에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드레스는 한 벌 맞춰야 할 것 같아’라고 답변한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하나 받았으니 약속은 지켰네요.(웃음) 김고은이라는 멋진 배우와 작업한 제가 자랑스럽고, 배우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_장재현 감독

올해 내실을 다지며 공들인 프로그램은 ‘마리끌레르 액터스 & 비욘드’다. 이 일환으로 한국 영화를 향한 응원과 지지의 의미를 담아 젊은 배우들과 함께 배우가 사랑한 한국 영화를 상영했다. 시대의 청춘을 대표하는 두 배우 홍경과 김민하가 그 주인공이었다. 두 배우는 약속 한듯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가장 빛을 발하던 시기의 영화를 선택했다. 배우 홍경이 고른 영화 <만추>는 티켓 오픈과 동시에 2백 석 전석 이 순식간에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 자리는 이은선 영화 칼럼니스트와 함께 깜짝 게스트로 <만추>를 연출한 김태용 감독이 함께했다.

왼쪽부터ㅣ배우 홍경, 감독 김태용, 모더레이터 이은선.

“이렇게 영화관을 꽉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 <만추>를 너무나 사랑하는데 여기 오신 분들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올해가 7개월 남았죠. 올 한 해 가장 행복한 순간일 거라 감히 확신합니다. 김태용 감독님, 영화 후반 작업으로 바쁘신 와중에 낯선 배우와 함께 마음 열고 대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_ 홍경 배우

“홍경 배우에게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 있잖아요. <결백> 등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다 다른데, 사실 이렇게 선하면서 매력적이기 쉽지 않거든요. 독특한 매력의 소유자인 것 같아요. 홍경 배우님 덕분에 창고에 있는 영화를 꺼내 이렇게 관객들에게 보일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_ 김태용 감독

배우 김민하는 전도연, 설경구 배우의 푸른 시절을 볼 수 있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관객과 함께 관람했다. 김민하 배우는 “고자극 시대잖아요. 모든 게 자극적인 이때에 그 안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잔잔한 물잔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이 작품을 함께 나누고자 한 이유를 밝혔다.

드레스 comme des GARCONS
네크리스 DIO

“고자극 시대잖아요. 모든 게 자극적인 이때에 그 안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잔잔한 물잔 같은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공감하고 위로받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고요.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_ 김민하 배우

한국 영화 하반기 개봉 기대작으로는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를 상영했다. 한국 사회의 성적 지향과 여성의 돌봄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가는 영화로 이미랑 감독과 오민애, 허진, 임세미, 하윤경 배우가 함께 극장을 찾았다. <씨네21> 김소미 기사의 진행 아 래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라는 허진 배우의 말에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진화하고 있다는 걸 믿길 바랍니다. 사려 깊게 문제를 고쳐나가려는 제인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바닷물은 3%의 소금으로 정화된다는 거 아시죠?”라는 오민애 배우의 다독임으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왼쪽부터ㅣ감독 이미랑, 배우 임세미·하윤경·허진·오민애, 모더레이터 김소미.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진화하고 있다는 걸 믿길 바랍니다. 사려 깊게 문제를 고쳐나가려는
제인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바닷물은 3%의 소금으로 정화된다는 거 아시죠?” _ 오민애 배우

“‘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_허진 배우

여정의 피날레는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가 장식했다. 상반기 가장 뜨거운 작품으로 호평받은 시리즈로 마리끌레르 영화제 역사 상 첫 시리즈물 상영이었다. 이 자리에는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 임대형·전고운 감독, 안재홍·이솜 배우가 함께했다. 전고운 감독은 “6화는 두 배우의 연기 차력 쇼라 할 만큼 열연이 극에 다다른 화이며, <LTNS>는 이 마지막 화를 위해 달려왔다 해도 무방합니다”라고 마지막화 상영의 이유를 밝혔다. 나란히 앉은 네 사람은 한 목소리로 ‘영화제라는 자리를 통해 극장 상영을 하고 관객을 직접 만나 작품에 대한 내밀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의미 있었다’고 말하며 함께 영화를 보는 기쁨, 영화관과 영화제의 존재 이유를 새삼 깨닫게 했다. 두 명의 감독, 두 명의 배우가 이루는 팀워크가 빛나는 작품이니만큼 만을 위한 특별한 트로피 ‘스파크 오브 더 이어’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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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이 홈그라운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게 마음이 더 편한 것 같아요. 많은 분이 한자리에 모여 저희 드라마를 봐주신다는 것이 기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_ 임대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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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시리즈물이라 이렇게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객석에서 함께 봤는데 그간 안 보이던 부분도 발견하며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_ 안재홍 배우

스마트폰만 들어도 20초어치의 도파민이 알고리즘을 타고 끝없이 쏟아지는 시대. 구태여 시간을 내 멀고, 좁고, 어두운 영화관 안을 찾아온 사람들을 생각한다. 아늑한 어둠 속 스크린을 마주할 때 세상의 소란함과는 무관한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것처럼 영화제의 시간은 달리 흐른다. 지난 3일 동안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는 같은 것을 보고 감탄하고 황홀해하던 무언의 공기가, 언제까지고 계속 듣고 싶던 이야기가 있었다. 오늘 우리 앞에 선 영화관의 위기가 벼랑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낙관의 단서를 지난 11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발견했다. 매해 관객과 함께하겠다는 의지로 이 낙관의 단서를 현실로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니 내년에도 기쁘게 다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