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마리끌레르 아시아스타어워즈의 사회를 맡아준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덕분에 근사하고 아름다운 자리가 되었다. 그날을 회상하면 어떤 모습들이 떠오르나?
참여하게 되어 오히려 영광이었다. 공식 석상은 좀 엄숙한 분위기로 흐를 때가 있지 않나. 그런데 아시아스타어워즈는 파티에 온 듯 다 같이 즐기는 분위기라 진행하는 사람으로서도 편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보통의 가족> 팀이 있어서 든든하기도 했고.(웃음) 그날을 포함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머무는 내내 마냥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의 가족> 오픈토크와 GV 현장의 열기가 굉장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픈토크 날은 비가 오는 데도 준비된 좌석이 한참 부족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이른 아침에 진행한 GV에도 좌석을 가득 메운 관객이 굉장히 열성적으로 영화를 봐주었다. 관객 수에도 놀랐지만 관객의 질문을 받으면서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질문을 하는 통에 감독님이 “그렇게까지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요” 하고 말할 정도였다.(웃음) 관객은 영화의 모든 부분을 놓치지 않고 보는구나 싶고, 더 내밀하고 치열하게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한 시간이었다.
그날의 열기가 잔잔하지만 꽤 오래 이어지고 있다. 두 달 전 프랑스에서 <보통의 가족> 관객 수가 2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프랑스에서 개봉한 한국 영화 중 가장 높은 기록이라고 하더라.
며칠 전에 해외 게스트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A Normal Family>(<보통의 가족>의 영어 제목)> 얘기를 먼저 꺼내며 ‘지수’(수현)가 입는 옷의 색깔과 이야기의 맥락을 연결 짓는 해석을 들려주었다. 되게 뿌듯하면서도 신기하다. 개봉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니 작품과 거리가 생길 법도 한데, 이런 고마운 소식들이 나를 다시 작품과 만난 때로 데려다준다.
얘기가 나온 김에 <보통의 가족>을 만났던 순간도 회상해보자. 지수라는 인물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잘못하면 발연기처럼 보일 수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진심이었다.
처음에 이 역할을 제의받았을 때, 이 가족 사이에 완전히 스며들지 못하고 애매한 지점에 머무는 지수가 잘 보이지 않거나, 보인다고 해도 호감을 얻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을 하는 방식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가만히 얘기를 듣다가 덤덤하게 툭 자신의 의견을 던지는데, 감정 없이 하는 말도, 그렇다고 폭발하듯 내뱉는 것도 아닌 이 인물만의 정도를 어떻게 맞춰야 하나 싶었던 거다. “이렇게는 어때요? 저렇게는요?” 하면서 감독님과 여러 방식을 시도하고 의논하면서 지수의 말을 만들어갔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벌어진 사고 이후 지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등장하는 네 인물 중 영화가 끝난 뒤 안위가 가장 걱정되는 사람이 지수였다.
나도 그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지수는 결국 신고를 했을까? 어떻게 살까? 가족을 안 보고 살게 될까? 어쨌든 아이를 위해서라도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배우들끼리는 사실 ‘재완’(설경구)은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고.(웃음)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또 하나 인상 깊은 말이 있었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첫 드라마가 2006년에 공개되었으니, 어느덧 데뷔 20년 차다. 그럼에도 지난해를 ‘시작’이라 표현한 이유가 궁금했다.
<보통의 가족>이 나의 첫 한국 영화다. 그러니까 드디어 한국 영화 신 안으로 들어갔다는 소속감이 든 첫해가 아닌가 싶어서 ‘시작’이라는 단어를 썼던 것 같다. 그간 국내에서도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늘 관객에게 나는 한국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는 지점이 있었다. 그런데 <보통의 가족>을 통해 완벽한 ‘한국의 영화인’이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편으론 연기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는 점에서도 시작이라 할 만하다. 연기를 전공하지 않았고, 커리어를 배우로 시작하지도 않은 터라 늘 나의 부족함을 들키지는 않을지 두려움이 있었는데, 근래 여러 작품을 하면서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설레고 흥미로운 일로 느껴진다. 감독님, 배우들과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도 알게 됐고. 여러모로 시작할 때 느끼는 활력이 생긴 듯하다.
호기롭게 시작을 외치고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의 에너지는 어느 정도인가?
최근 <신의 구슬>이라는 드라마 촬영을 끝냈다. 1년 정도 찍었으니 퍽 긴 여정이었는데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한테 빨리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다들 조금만 쉬라고 말리는 중이다.(웃음)
어쩌면 지금이 배우로서 가장 혈기 왕성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런 것 같다. 내가 진짜 연기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새삼 깨닫고 있다. 얼마 전에 해내기 쉽지 않을 것 같은 해외 작품을 제안받았는데,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오히려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더라. 일단 오디션을 보겠다고 했다. 설사 오디션에 떨어진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말하는 얼굴에서 좋아서 하는 사람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연기의 재미를 발견한 덕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편안하고 쉽고 뻔한 것에 오히려 즐거움을 못 느낀다. 일할 때도 평소에도 승부욕이 꽤 센데, 그게 스스로를 상대로 발현될 때가 많다. 어렵고 무서운 것 앞에서 오히려 ‘해보자’는 자세가 되는 사람.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어려워도 해보자는 승부욕이 발동하나?
일단 주관이나 목적이 뚜렷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캐릭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래서 작은 역이라도 존재의 이유나 가려는 방향이 명확히 보이는 인물들을 연기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바운더리를 넓히는 데 더 빠져 있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특성이 있지 않나. 여성이다, 키가 크다, 영어를 쓸 줄 안다 등. 이런 조건에 맞는 타입캐스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사실 작품의 스케일로 봤을 때 무조건 해야 할 제안을 받은 적도 있는데, 하지 않았다. 그 작품이 필모그래피를 화려하게 만들 수 있어도, 나의 영역을 넓힐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라는 의문이 드는 캐릭터에 끌리는 편이다. 요즘 나의 추구미다.(웃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식의 단독 사회를 맡았다. 이 역시 추구미에서 기인한 도전인가?(웃음)
비슷하다. ‘혼자서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들긴 했으니까.(웃음) 그렇지만 두려움이나 부담감은 없다. 폐막식이라는 드라마는 내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각각의 영화 자체가 빛나서 생기는 것일 테니. 나는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면서 아름다운 영화들을 관객에게 잘 전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어떤 장면들을 마주하게 되길 기대하나?
일단 영화제 자체가 배우에게는 굉장한 에너지와 영감을 주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공식 행사에서든, 그 밖의 어디서든 영화에 대한 크리에이티브한 에너지가 넘치는 현장이지 않나. 국내외 영화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덕에 잠도 거의 못 자고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묘하게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다. 창작자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부산에 있다 보면 나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도 엄청난 동력을 얻게 될 거라 기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