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2026 공방 컬렉션의 오프닝 룩은 이브닝 드레스도 트위드 슈트도 아닌, 카멜 컬러 쿼터집업넥 니트였다.
경기장에서 일상으로 스며든 쿼터집업



넥라인에서 가슴 상단까지 약 1/4 길이만 지퍼로 여닫는 니트 또는 스웨트셔츠를 ‘쿼터집업(quarter-zip)’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일상복에서 흔히 보이지만, 이 디테일의 출발점은 스키장과 산악 트레일 같은 아웃도어 현장이었습니다. 강한 바람과 체온 변화가 반복되는 환경에서는 열과 통풍을 빠르게 조절할 수 있어야 했고, 이런 필요로 인해 옷을 벗지 않고도 지퍼 하나로 조절하는 실용적인 쿼터집업이 탄생하게 됐죠. 20세기 초 지퍼 기술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되자 아웃도어 브랜드와 스포츠웨어 레이블은 플리스 톱과 울 스웨터에 이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적용했습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쿼터집업은 주말 레저룩, 골프웨어, 요트룩 등 보다 여유로운 라이프스타일 영역으로 확장됐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프레피한 남성 니트’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게 됐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쿼터집업이 더욱 일상적인 아이템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셔츠 위에 쿼터집업을 겹쳐 입고 치노 팬츠나 슬랙스를 매치하는 방식이 미국과 영국에서 하나의 드레스 코드처럼 굳어지며, 금융권·컨설팅 회사·정치권 등 특정 직군의 단정한 니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죠. 책임과 지위를 상징하는 옷차림이라는 의미가 더해지는 한편, 무난하고 보수적인 남성 니트라는 이미지도 함께 따라붙었습니다.
Z세대가 다시 호출한 쿼터집업
2025년, 쿼터집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그 무대는 런웨이가 아니라 바로 틱톡이었죠. #QuarterZipWinter, #QuarterZipMovement 같은 해시태그가 붙은 숏폼 영상 속에서 젊은 흑인 남성 크리에이터들이 스트리트웨어와 트랙수트를 내려놓고 보다 단정한 쿼터집업 스타일로 갈아입고서 등장했습니다. 이 변화에는 단순히 니트 하나를 교체하는 차원을 넘어선 흐름이 담겨 있었죠. 로고 중심의 테크웨어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 차분하고 균형 잡힌 라인을 선택하는 동시에, 여전히 자신들이 속한 커뮤니티의 톤과 밈 문화를 그대로 품어냈습니다. 이런 흐름을 빠르게 간파한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해외 주요 매체들도 이를 ‘Z세대가 재정의한 새로운 어른스러움’으로 분석하며 쿼터집업을 주목했습니다.
하이엔드 무드 속에서 자라난 쿼터집업의 전조



쿼터집업에 대한 재평가는 SNS 안에서만 벌어진 변화는 아닙니다. 몇 시즌 전부터 여러 럭셔리 브랜드들은 눈에 띄지 않게 이 실루엣을 자신들의 컬렉션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죠. 캐시미어·메리노 울로 짠 하이넥 집업 니트, 셋업 슈트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얇은 게이지의 집업, 케이블 짜임 위에 지퍼 디테일을 더한 하이브리드 니트까지 다양한 방식의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다만 이 시점의 쿼터집업은 전면에 나서는 주연이라기보다 컬렉션의 분위기를 받쳐주는 조연에 가까웠습니다. 룩북에서는 모델의 목을 정리하는 조용한 레이어로, 오피스 캡슐에서는 실용성을 보완하는 두 번째 니트로 제 역할을 해냈죠. 화려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제품의 소재감과 만듦새를 앞세워 미세하게 변화하는 취향의 방향을 읽어낸 제안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쿼터집업은 고급 니트웨어 라인의 한 축이라는 인식이 쌓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럭셔리 하우스들이 다음 시즌의 실루엣 흐름을 가늠하는 데 참고가 됐습니다. 그렇기에 샤넬 공방 컬렉션의 오프닝 룩은 갑작스런 선택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조용히 감지되던 흐름이 마침내 완성된 형태로 드러난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쿼터집업이 열어젖힌 샤넬의 새 장


다시 뉴욕 지하철 플랫폼으로 돌아가 봅시다. 샤넬의 새로운 패션 부문 아티스틱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는 오프닝 룩에 카멜 컬러 쿼터집업을 올리면서 이 실루엣의 길고 복잡한 역사를 단숨에 뒤집는 장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쿼터집업 넥 니트를 즐겨 입는 그는 자신의 일상적 스타일을 메종의 시그니처 언어로 끌어올렸죠. 예전에 칼 라거펠트가 흰 셔츠와 타이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했다면, 블라지는 쿼터집업을 통해 샤넬의 온도를 낮추고 리듬을 바꾸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쿼터집업은 블라지가 추구하는 패션적 메시지와 다름없습니다. 그는 과하게 화려한 로고와 장식, 반복되는 패턴 대신 보통의 옷으로 돌아가 실루엣·질감·소재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샤넬의 균형을 다시 잡고 있죠. 그 과정에서 가장 평범하게 보이는 니트를 정면에 세우는 선택은 오히려 하이 패션의 최전선에 선 샤넬에게 과감한 움직임으로 읽힙니다. 트위드 수트보다 먼저 등장한 쿼터집업은 ‘샤넬은 이제 일상과 접점을 넓히겠다’라는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누군가는 ‘오프닝 룩 치고는 너무 심심한데?’라고 할 수 있지만, 쿼터집업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판단이 얼마나 단순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쿼터집업에는 시대의 움직임이 층층이 쌓여 있었으니까요. 스포츠웨어에서 출발해 클래식한 스마트 캐주얼의 계보를 거치고, 이어 Z세대의 틱톡 피드를 통과해 다시 럭셔리의 언어로 번역되기까지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밀어왔는지를 확인하게 해줍니다. 결국 일상적인 옷일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고, 같은 실루엣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을 띤다는 사실을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