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크 니샤니앙의 맨즈 유니버스는 영원하리.
베로니크 니샤니앙이 정의한 에르메스 남성복의 정체성은 37년이라는 시간 동안 거의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패션 역사 속 수많은 트렌드가 떠오르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그의 세계는 늘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죠. 1988년, 에르메스에 합류해 남성복을 이끌어온 그는 2026 F/W 컬렉션을 끝으로 하우스를 떠납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럭셔리 하우스이자 ‘콰이어트 럭셔리’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에르메스, 그리고 그와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던 니샤니앙의 은퇴 소식은 패션계에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니샤니앙이 이끈 에르메스 남성복은 유행을 앞서기보다, 브랜드의 세계 안에서 천천히 숨을 쉬듯 변화해왔습니다. 부드럽고 차분한 색감, 정교하게 재단된 실루엣, 그리고 손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소재의 밀도는 지난 40여 년간 에르메스 남성복을 대변해왔죠. 1988년, 당시 에르메스 최고경영자 장-루이 뒤마의 제안으로 합류한 니샤니앙은 승마 헤리티지와 장인정신, 파리지앵 특유의 여유를 남성복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에르메스만의 맨즈 유니버스를 완성했습니다.
콰이어트 럭셔리의 정수

니샤니앙의 37년을 관통하는 미학은 ‘절제된 우아함’입니다. 그는 로고 플레이나 과장된 실루엣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재와 색, 완성도 높은 마감, 그리고 입었을 때의 감각처럼 가까이에서 보고 경험해야만 드러나는 요소에 집중했죠.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는 이 태도는 파리지앵 남성은 물론, 전 세계 감각적인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요. 패션 저널리스트 팀 블랭크스(Tim Blanks)와 패션 컬렉터이자 <AnOther Magazine>의 편집장 알렉산더 퓨리(Alexander Fury)는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눈에 띄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분명해지는 옷, 평범해 보이지만 매우 정교한 옷”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죠. 니샤니앙은 럭셔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오늘날 ‘콰이어트 럭셔리’라 불리는 미학의 원형을 구축했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소재 사용




사슴가죽, 크로커다일 레더, 실크, 캐시미어 등과 같은 고급 소재는 에르메스 남성복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이었습니다. 니샤니앙은 실크를 니트웨어로, 가죽을 테일러드 슈트로, 캐시미어를 데일리웨어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에르메스 장인 네트워크를 남성복 전면에 끌어들였는데요. 특히 1991년에 선보인 레더 모터사이클 점프슈트는 그 상징적인 출발점이었습니다. 밀리터리 웨어의 구조에 최고급 레더를 입힌 이 룩은 이후 에르메스 남성복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죠. 2003년에 공개된 핀 스트라이프 레더 슈트 역시 빼놓을 수 없고요. 이처럼 니샤니앙은 소재 사용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스타일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용 범위를 넓혔습니다.
색으로 구축한 세계관


컬러 팔레트 또한 니샤니앙의 중요한 유산입니다. 올리브, 네이비, 브라운, 그레이, 카멜처럼 은은한 톤의 색은 에르메스 남성복의 상징적인 팔레트가 됐는데요. 니샤니앙은 여러 인터뷰에서 컬렉션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요소가 ‘색과 소재’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에르메스 남성복은 시즌마다 미묘하게 다른 톤으로 반복되었고, 그 반복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을 구축했죠.
조용한 혁신, 축적된 기술의 힘




니샤니앙은 화려한 실험이나 급진적인 실루엣으로 주목받는 디자이너는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전통적인 남성복 구조 안에서 미묘한 변주로 조용히 혁신을 이뤄냈는데요. 그는 에르메스 내부 태너리와 텍스타일 아틀리에와 협업하며 남성복 전용 소재를 공동 개발해 왔습니다. 방수 처리한 실크, 리버서블로 활용 가능한 레더, 크로커다일을 직물처럼 유연하게 처리한 가죽 등은 모두 전통 소재를 재정의하려는 오랜 실험의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기술적 축적은 시즌을 넘어 에르메스 남성복의 구조적 경쟁력을 만들어온 기반이었습니다.
라스트 댄스, 37년을 응축한 라스트 댄스




2026년 1월, 파리에서 공개된 니샤니앙의 마지막 컬렉션은 하나의 회고전과 같았습니다. 1991년의 점프슈트와 2003년의 핀 스트라이프 가죽 슈트가 다시 등장했고, 크로커다일 가죽 슈트, 실크 터틀넥, 시어링 라이닝 코트 같은 아이템들은 그가 구축해온 미학을 현재형으로 압축해 보여줬죠. 니샤니앙의 삶 그 자체였던 에르메스 맨즈 유니버스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는 평생 옷으로 말을 건넸고, 유행을 만드는 것보다 스타일을 만드는 데 집중해왔습니다. 자, 이제 바통은 웨일스 보너에게 쥐어졌습니다. 에르메스는 웨일스 보너를 차기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로 발표했고, 그의 첫 컬렉션은 2027년 1월 파리에서 공개될 예정인데요. 유구한 역사와 확고한 정체성 위에서 웨일스 보너가 이끄는 에르메스는 또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요? 베로니크 니샤니앙이 남긴 37년의 유산은 이제 다음 세대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