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저 파노라마에서 출발한 무대, 느림과 응시의 시간으로 재구성한 발렌티노 2026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 ‘스페쿨라 문디’.

앞서 파리에서 공개된 발렌티노 2026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옷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앞서, 보는 행위 그 자체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발렌티노는 이미지가 끝없이 생산되고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시대 속에서 시선을 붙잡기보다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방식을 택했죠.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과도하게 재생산되는 이미지들의 무한한 순환을 주의 깊은 비밀스러운 관찰의 상태와 충돌시키고자 했습니다.

옷을 입는 행위와 보여짐이 교차하는 이 애매한 경계에서 시선은 친밀하면서도 쉽게 닿을 수 없는 공간으로 스며듭니다. 그곳은 관음적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는 디스토피아적이면서도 기계적인 리듬의 공간이자 동시에 기대감으로 충만한 장소이죠. 관객은 더 이상 하나의 장면을 함께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사각지대에서 현대적인 엿보기 쇼(Peepshow)처럼 타인을 은밀히 응시하게 됩니다.

느림과 고립의 장치, 카이저 파노라마로 재구성한 무대

이번 ‘스페쿨라 문디(Specular Mundi)’ 컬렉션의 무대는 19세기 말 유럽 도시를 떠들썩하게 했던 시각 장치 ‘카이저 파노라마’에서 출발했습니다. 원형 구조물에 배치된 작은 관람 창을 통해 이미지를 바라보던 이 장치는 한 공간에 함께 있으면서도 각자가 고립된 시선으로 이미지를 경험하도록 설계된 장치였죠. 발렌티노는 이 구조를 오트 쿠튀르 쇼의 무대로 치환하며 관객을 단순한 ‘관람자’가 아닌 시선의 위치를 자각하는 존재로 끌어들였습니다.

관객은 컬렉션 무대 전체가 아닌 정해진 한 공간만을 제한된 시야로 볼 수 있었는데요. 이는 가시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가시성을 통제하고 응시를 요구하는 구조였죠. 모두가 같은 장면을 공유하지만, 누구도 동일한 이미지를 보지 않는 상태. 이러한 설정은 오트 쿠튀르가 본래 지녀온 느림, 근접성, 집중의 시간성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며 쇼를 하나의 의례에 가깝게 만들었습니다. 미켈레는 옷을 더 이상 스크롤을 내리며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멈춰 서서 바라봐야 하는 대상으로 자리하게 했죠.

신성한 실루엣과 제의적 태도

컬렉션 전반을 관통한 실루엣은 신체를 감싸안는 듯한 긴 라인과 팔을 넓게 펼친 케이프 구조였습니다. 옷과 더불어 광휘를 연상시키는 골드 헤드피스와 깃털 장식은 성상화 속 인물을 떠올리게 했죠. 섬세한 비즈와 크리스털 자수가 촘촘히 얹힌 시스루 드레스는 신체를 은은하게 드러냅니다. 케이프는 팔을 벌린 순간에만 완전히 형태를 드러내며 정지와 확장의 대비를 만들어내죠. 이러한 요소들이 겹치며 컬렉션 무대 위 모델들을 신화 속 숭배의 대상으로 인식됩니다.

고전 할리우드 영화와 노스텔지어

이번 시즌의 또 다른 축은 영화였습니다. 이는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직접 보는 게 꿈이었던 열세 살의 소년 미켈레의 어린 시절 동경과 꿈을 담고 있죠. 특히 고전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여성 이미지의 실루엣과 제스처가 곳곳에 스며들어있는데요. 과장된 볼륨과 그래픽적인 스트라이프 패턴, 깊게 파인 네크라인과 허리를 단단히 조여 매는 빅사이즈 벨트 그리고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지는 기장의 드레스 실루엣은 스크린 속 그 시절 할리우드 배우가 카메라 앞에 멈춰 선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수, 비즈, 깃털의 집적된 시간

쿠튀르의 본질은 결국 손으로 완성되는 시간의 집적이죠. 이번 컬렉션에서는 섬세한 비즈 자수, 깃털 장식, 레이스와 시폰이 겹겹이 쌓이며 압도적인 밀도를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검정 바탕 위에 금빛과 은빛 실로 빽빽하게 수놓은 플로럴 모티프 드레스에서는 자수가 장식이 아닌 패턴 그 자체로 작동합니다. 꽃무늬 자수가 밀도 있게 얹힌 블랙 머메이드 드레스에서는 자수가 무게와 시선을 동시에 형성하고 드레스 끝단의 패턴이 확장되며 실루엣의 균형을 완성하죠. 화려한 디테일 그 안에는 수없이 반복된 노동의 흔적이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빠른 이미지 소비에 대한 미켈레식 가장 느린 반박이었죠.

자리를 빛낸 셀럽들

이날 쇼에는 하우스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글로벌 셀럽과 패션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습니다. 특히 다코타 존슨, 타일라, 아이브의 리즈와 레이 등 다양한 분야의 셀럽들이 쇼에 모습을 드러내며, 각자의 방식으로 발렌티노의 미학을 해석한 룩을 선보였죠.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이번 발렌티노 2026 봄-여름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통해 오트 쿠튀르가 여전히 느림과 집중의 가치를 지녔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멈춰 서서 바라볼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 발렌티노가 제시한 이 신중하고도 은밀한 태도는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쿠튀르의 자리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합니다.

미켈레가 창문 사이로 만들어낸 발렌티노 2026 봄-여름 오트 쿠튀르 쇼의 긴장과 여운을 마리끌레르의 영상과 함께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