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그룹전 ‘Boiling Point 90°C’. 성광, 재진, 수린 세 명의 작가가 포착한 저마다의 변화 직전의 뜨거운 순간.

끓기 직전에 가장 뜨거우면서 조용한 온도
물이 완전히 끓어오르기 직전, 표면은 생각보다 고요하죠. 하지만 그 안에서는 작은 기포가 생겼다 사라지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열이 차곡차곡 쌓이며 다음 상태를 준비합니다. 학고재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3인전 《Boiling Point 90°C》는 바로 그 순간을 전시장 안으로 불러옵니다. 이번 전시는 성광(Gwaxng), 재진(JEJn), 수린(SURIN) 세 작가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소개하는데요. 전시 제목처럼 작품들은 완전히 폭발한 100도가 아니라 변화가 임박한 90도의 온도를 보여주죠.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 기존 질서 안에 말끔히 들어가지 않는 이미지, 디지털로 만들어졌지만 누군가의 믿음을 품게 되는 사물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끓어오릅니다.
괴물이 된 감정의 페르소나, 성광


성광 작가의 작품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형형색색 괴물들의 얼굴입니다. 크게 벌어진 입,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어딘가 낯설지만 묘하게 친숙한 괴물의 얼굴. 그의 인물들은 인간과 동물 사이, 귀여움과 난폭함 사이, 농담과 분노 사이를 바쁘게 오가죠. 또한 에어스프레이의 분사감과 붓질의 물성이 뒤섞인 작품은 감정이 단정한 문장으로 정리되기 전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억눌린 마음이 오래 참다가 결국 표정으로, 몸짓으로, 소리 없는 외침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죠. 흥미로운 점은 이 괴물들이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자, 그래픽 티셔츠, 변형된 로고처럼 스트리트 문화의 기호들이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데요. 무섭게 이를 드러낸 괴물인데, 어딘가 사람처럼 친숙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성광에게 괴물은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페르소나에 가깝습니다. 작가는 감정의 비형상성을 구체적인 얼굴과 몸으로 끌어내며, 괴물을 억제된 감정의 표상이자 관람자의 기억과 정서를 비추는 매개로 사용하죠.
공방에 들어온 소비 이미지, 재진


재진 작가의 작품 앞에서는 시간 감각이 살짝 엇갈립니다. 작품의 뼈대는 16세기 목판화 속 공방 풍경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 들어온 것은 동시대의 소비 이미지와 아트 컬처의 상징이죠. 과거 장인들의 작업실 같은 공간 안에 오늘의 캐릭터와 브랜드적 기호가 등장하고, 고전적인 흑백 선묘 위로 강렬한 색채가 불쑥 끼어듭니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장인이 갑자기 리셀 플랫폼을 열어본 듯한 장면이 펼쳐지는 셈이죠. 재진 작가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으며, 나이키 등 유명 스니커즈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스트리트 패션 영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해 왔는데요. 이 경험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소비사회의 이미지가 어떻게 문화적 상징으로 변하고, 또 그 상징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노동과 욕망의 장면 안에서 달궈지는지를 보여주죠.
3D 프린팅으로 출력되는 토템, 수린


성광 작가의 작품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감정이라면, 수린 작가의 조각은 조용히 쌓인 믿음을 연상케 하는데요. 3D 프린팅으로 만들어진 꽃, 곤충, 석탑 형식의 조각들이 스테인리스 현판과 거울 위에 자리합니다. 차갑고 반짝이는 금속 표면 위에 놓인 물감 같은 오브제들은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은 부적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특히 ‘Lucky Bugs’ 연작의 잠자리, 무당벌레, 사슴벌레, 나비는 선명한 캔디 페인트의 광택을 입고 유쾌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는 디지털 기반의 아트워크와 3D 프린팅 오브제 작업을 통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탐구해 온 작가이죠.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믿음입니다. 어떤 사물이 특별한 힘을 갖는 이유가 그 자체의 신비로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그것을 바라보고,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을 얹는 순간 사물은 개인적인 토템이 되죠. 수린의 3D 프린팅 조각 역시 첨단 제작 기술로 만들어졌지만, 관람자의 시선과 바람이 닿는 순간 다른 층위의 감각을 얻습니다. 필라멘트를 한 층씩 쌓아 올리는 제작 방식은 돌을 하나씩 올려 탑을 세우던 오래된 기원의 시간과도 묘하게 겹쳐집니다.
지금 전시를 봐야 하는 이유
《Boiling Point 90°C》가 흥미로운 이유는 세 작가의 작업이 서로 전혀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같은 온도에 머문다는 점입니다. 성광은 감정이 괴물의 얼굴을 얻는 순간을 보여주고, 재진은 과거의 공방과 현재의 소비 이미지가 충돌하는 장면을 만듭니다. 그리고 수린은 디지털로 출력된 사물이 믿음의 매개가 되는 과정을 따라가죠. 인간과 동물, 과거와 현재, 전통과 첨단. 서로 다른 경계들이 전시장 안에서 부딪히고, 그 마찰이 바로 이 전시의 열기를 만듭니다. 전시《Boiling Point 90°C》가 붙잡는 것은 완전히 끓어 넘쳐 기화돼 버린 무언가가 아닌 그 직전의 팽팽한 시간입니다. 학고재 아트센터의 이번 전시는 그 복잡한 마음의 온도를 괴물의 얼굴과 오래된 목판화 속 유머, 그리고 반짝이는 현대식 토템으로 바꿔 보여주죠. 지금 내 안의 온도는 몇 도쯤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