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펼쳐집니다.

@seoulmuseumofart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 추상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 유영국. 강렬한 원색과 단단한 기하학적 형태로 자신만의 추상 세계를 구축했던 그를 집중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립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오는 10월 25일까지 서소문본관에서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유영국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이자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선보이는 ‘한국 근대 거장전’ 시리즈의 첫 프로젝트이기도 하죠.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건 유영국 특유의 색채입니다. 선명한 붉은색과 노란색, 깊은 보라와 초록이 화면 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균형을 이루며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죠. 얼핏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유영국이 평생에 걸쳐 연구했던 ‘산’의 실루엣이 숨어 있습니다. 실제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더라도 화면 전체에는 산맥이 가진 리듬과 고요함 그리고 자연의 압도적인 기운이 흐르죠.

이번 전시의 흥미로운 지점은 전통적인 연대기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유영국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1964년을 중심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독특한 동선을 구성했는데요. 덕분에 관람객은 단순히 “초기-중기-후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대신 유영국이 왜 추상에 몰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조형 언어를 단단하게 구축했는지를 훨씬 입체적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직선이 있는 구도>, 1949 / © 유영국

유영국이 선택한 ‘산’이라는 언어

유영국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산은 고향 울진의 기억이자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점과 선, 면과 색으로 구성된 산은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 내면의 구조에 가깝죠. 산을 바라보며 자란 어린 시절의 감각, 자연과 마주했던 기억 그리고 자신만의 질서를 향한 집요한 탐구가 모두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미공개작을 포함해 회화, 드로잉, 사진, 부조, 아카이브 자료 등 총 170여 점이 소개되는데요. 유영국이라는 작가가 어떤 시대를 지나왔고 무엇을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구성이죠.

<작품(Work)>, 1964 / © 유영국

1964년, 자신만의 색채를 보여준 첫 개인전

이번 전시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1964년’입니다. 유영국은 48세가 되어서야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미 신사실파와 모던아트협회 등 한국 현대미술사의 주요 흐름을 이끌고 있었던 인물이었지만, 의외로 개인전은 늦은 편이었죠. 당시 평론가 김영주는 그의 작품을 두고 “탐구적인 색채의 연마사”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그 이후의 선택입니다. 유영국은 그룹 활동 중심의 화단 흐름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의 개인전만으로 작품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동시대 예술가들이 프랑스와 뉴욕으로 향하던 시기에도 그는 한국에 남았으며, 매일 아침 작업실로 출근하듯 그림 앞에 앉았죠. 시대의 속도보다 자신의 리듬을 선택했던 셈입니다. 그 태도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유영국의 그림은 감정을 과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데요. 화면 안에서 색은 서로 밀고 당기고 삼각형 형태는 산처럼 솟아오르며 단단한 선은 공간 전체를 팽팽하게 긴장시킵니다. 그래서 그의 추상은 차갑고 이론적인 기하학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과 감각, 리듬과 호흡이 살아 움직이는 풍경처럼 느껴지죠.

<작품(Work)>, 1967 / © 유영국

자연과 내가 조화를 이룬 ‘심상 추상’

전시 후반부에서는 유영국의 후기 작업 세계를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1977년 심장 박동기 부착 수술 이후에도 8번의 큰 수술과 무려 37번의 입퇴원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붓을 내려놓지 않았죠. 매일 같은 시간 작업실로 향하며 그림을 그렸고 조수 없이 직접 손으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그의 산은 더욱 단순해집니다. 형태는 간결해지고 색은 깊어지며 화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가 감돕니다. 마치 오래 산을 오른 사람이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처럼 말이죠. 화려한 기교 대신 삶을 통과한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침묵과 밀도가 느껴집니다. 특히 절필작인 〈작품〉(1999)과 대형 연작 〈산-레드〉, 〈산-블루〉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유영국은 마지막까지도 산을 그렸고 선과 색이 만나는 가장 본질적인 순간을 탐구했습니다. 그의 산은 단지 자연의 형상이 아니라 삶과 시간, 기억과 감정이 응축된 하나의 조형 언어였던 셈입니다.

<작품(Work)>, 1999 / © 유영국

지금 다시 유영국을 보는 이유

디지털 이미지와 AI 기반 창작이 빠르게 확장되는 시대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시각 문화를 바꾸고 있는 지금, 오히려 유영국의 회화는 더욱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화면 위에 남겨진 손의 흔적, 색을 쌓아 올린 시간, 반복되는 붓질의 밀도는 회화라는 매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키죠. 무엇보다 이번 전시는 “추상이 어렵다”라는 선입견을 자연스럽게 허물어냅니다. 유영국의 그림은 설명보다 감각으로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죠. 붉은 산과 보랏빛 면, 노란색의 진동과 짙은 초록의 대비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화면 안으로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전시는 단순히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을 돌아보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색과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체감하게 하죠. 초여름의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강렬한 ‘산’을 만나고 싶다면, 이번 전시는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이 되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Work)>, 1977 / © 유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