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 필요했다. 강도 높은 일과 자신을 몰아치는 강박은 몸을 완전히 소진 시켰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요가를 시작했다. 동네 벗어나기를 줄였다. 아이를 키우며 집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만 했다. 줄이고 줄이자 삶에 균형이 생겼다. 

그 단순한 삶의 태도는 옷장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일어났다. 구두는 스니커즈가 되었고 스니커즈는 ‘쪼리’가 되었다. 요가복이 일상복이 되었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요가를 하지 않는 날에도 요가복을 입었으니까. 흥미로운 건 이 변화가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라 일종의 침식이었다는 점이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 집에 있을 때, 개를 산책시킬 때나 옷의 구성은 크게 달라 지지 않았다. 나는 테일러링이나 소재의 질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매번 가벼운 쪽을 택했을 뿐. 그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 전혀 다른 사람의 옷장이 되었다. 집에 있는데 동네 친구들이 부르면 그 차림 그대로 동네를 오갔다. 맨 얼굴. 머리는 안감었도 캡모자가 있으니 괜찮다. 이게 진정한 슬래커룩(애쓰지않는느긋함)지, 라며.

동네 친구들과 고수 하이볼을 파는 바를 즐겼다. 한두 잔씩, 그러다 셋이서 백 잔을 넘겼다. 그 정도면 사장님이 나를 모를 리 없다.그 단골 바에서 미팅을 잡은 날이었다. 약간의 메이크업, 단정한 옷차림. 시키던 고수 하이볼을 주문했다. 사장님이 말했다. 

“들어오시는데 못 알아봤어요. 고수 하이볼 시키시는 거 보고 알았네요. 오늘 어려 보이세요.” 그의 말이 댕, 하고 울렸다. 정적이 흘렀고 나는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의 칭찬에는 의도치 않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정확히 어떻게 보였는지에 대한, 아주 정직한 보고서. 나는 겉으로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요, 난 오늘 더 성숙해 보이려고 한 거라구요.” 그렇다. 나는 편안함을 추구하다 못해 슬래커 코어가 아닌 그냥 게으른 여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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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래커 코어가 처음 전한 메시지는 단순하다. 그만둬. 게을러져. 완벽하게 다듬어진 SNS 피드에 지친 사람들에게, 헐렁한 스웨트셔츠와 조거팬츠, 해진 데님 같은 평범한 옷들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태도가 쿨하다는 명제다. 그런지, 놈코어, 라운지웨어로 이어지는 무신경한 룩의 오래된 계보를 따른다. 베트멍은 오버사이즈 후디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오늘 아무것도 안 할거야.” 노력하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라는 건 새삼스러운게 아니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학교는 노력해야 성공한다고 가르쳤지만, 그런 것에 관심 없다는 듯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던 아이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멋이 있었다.

이 흐름 뒤에는 더 큰 흐름이 있다. 재택근무, 조기 은퇴, 혹은 나의 경우처럼 일과 삶의 균형을 우선시하는 쪽으로의 전환.  일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역사적인 비율로 직장을 떠났다. 팬데믹 이후 줄어든 인력 탓에 남은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일은 오히려 늘었다. 정해진 직무만 하고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이 정상인데도, 후기 자본주의는 직업적 성취로 가치를 증명하라고 채근하며 더 열심히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성공한다고 요구했다. 그 요구에 탈진한 사람들이 조용히 일에서 물러서는 쪽을 택했다. 이를 ‘콰이어트 쿼팅’이라 부르는데 Gen Z와 자주 연결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용주들이 “사다리를 오르고 싶은” 젊은 열망을 이용해 착취하기 가장 쉬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세대는 각자의 방식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환멸을 느낀다. 콰이어트 쿼팅이 보여주는 것은 야망과 지위에 대한 회의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나, 내가 쫓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누구에게 잘 보이려 이토록 애를 쓰는 걸까. 그래서 행복한가. 패션계의 의식이 게으른 군상으로 향하게 만든 이유다. 본래 삶은 느긋하게 살아야 한다는 듯, 타인의 시선에 덜 신경 쓰고 나를 위해서 옷을 입고 느리게 살기를 권했다.

그러나 이 트렌드는 애초부터 모순이다. 애쓰지 않는 게 멋이라는 의도와 달리, 하이패션이 그 멋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애씀 그 자체이다. 케이트 모스가 보테가 베네타 쇼에서 흰색 티셔츠와 헐렁한 데님 위에 블루 체크 셔츠를 입고 런웨이에 섰을 때 그 룩은 너무 평범해서 오프닝으로 내세우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그 플란넬처럼 보이는 셔츠는 사실 가죽이었다. 정확한 체크 컬러를 내기 위해 열두 번 인쇄를 거듭했다. 데님처럼 보이는 바지도 가죽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가죽 위에 열두 번의 손길이 필요했다.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 않은 모습은 늘 그렇게 모순적이다. 의도된 노메이크업, 오프듀티 드레싱, 계산된 인스타 덤프 튜토리얼 같은 것들 말이다.

흐트러짐과 후줄근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슬래커 코어가 지닌 느림의 미학이 청춘에게는 쿨함으로 빛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이라는 한계 앞에서 경계를 오가다 후줄근한 쪽으로 넘어졌다. 그 일 이후, 나는 다시 경계를 설정했다. 완전한 편안함에서 온전한 편안함으로. 무너지지 않는 편안함, 이라고 해야할까. 우선 쪼리를 벗었다. 대신 쪼리 힐이나 뒤축을 꺾어 신을 수 있는 바부슈를 신는다. 조금 불편하지만, 아니 사실 꽤 불편하지만 내 몸의 장점을 살리는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다시 꺼냈다. 캡 대신 선글라스를, 늘어진 티셔츠 위엔 길이의 비율을 계산하여 네크리스를 레이어한다.외출할 때는 그곳이 어디든 최대한 자연스럽게 피부에서 윤광이 돌게 베이스를 얇게 얇게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다.

Chanel
Chl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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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런웨이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싼 디자이너 티셔츠가 지겨울 때도 됐다. 2026년 봄, 런웨이 위에는 새로운 워크웨어라고 불리는 코퍼레이트 코어가 주류로 들어섰다. 90년대 미니멀한 오피스 룩에 슬래커의 느슨함을 더한, 그 어디쯔음이다.

클로에, 더 로우, 로에베는 칼라가 사라진 재킷을 선보였다. 오버사이즈로 입던 구조적인 재킷은 원버튼 크롭 실루엣으로 바뀌었다. 매튜 블라지의 샤넬 데뷔무대에도 이 재킷이 보였으니 다음 유행은 이미 정해진듯 하다. 거리도 다르지 않다. 캐주얼한 아이템을 섞으면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뉴트럴 톤으로 맞춘 옷차림이 눈에 띄게 늘었다. 슬립 드레스 위에 블레이저를 걸치고, 청키 로퍼에 로우라이즈 펜슬스커트를 매치하는 식이다. 워크 웨어라고는 하지만 출근이 목적은 아니다. 오피스와 거리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 세대에게 이는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누구나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다. 어딘가에 속하고싶은 마음과 남들과 달라보이고 싶은 마음 사이, 쉬고 싶은 본능과 성취하고 싶은 본능. 너무 애를 써도, 너무 애를 쓰지 않아도 매력 없다. 극과 극의 경계 위에서 그 휘청거림을 즐길 때, 우리는 생생하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