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기에 앞서 지난 4월, ‘2026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 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그중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부문에 선정된 10권 가운데 세 권의 책을 만든 여성 디자이너 세 명을 만났다.
책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어간다는 일. 오랜 시간 디자이너로 일하며 각자가 세워온 기준과 감각, 그리고 그 믿음 끝에 완성된 책에 대해 물었다. 책과의 첫 만남부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 불리기까지, 그 치열하고도 아름다웠던 과정에 대한 이야기.
인터뷰에 소개된 ‘2026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선정작들은 서울국제도서전 현장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정사록 <Atlas>
정사록, 그래픽 디자이너(@sa.rok.sarok)
1인 스튜디오 sarok을 운영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판, 워크숍, 전시 등의 형식으로 디자인에 대한 관심사를 풀어내며, 주로 문화예술 분야의 창작자들과 협업한다. <Atlas>의 저자 장서영 작가와는 2021년부터, 출판사 로쿠스 솔루스의 배은아 기획자와는 2023년부터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해 왔으며, <Atlas>로 올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었다.
저는 ‘구멍을 설치하는 사람’의 입장이었지만, 독자에게 “여기가 출구이니 꼭 이쪽으로 가세요” 하고 외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Atlas>는 어떤 계기로 시작된 책인가요?
이 책은 장서영 작가의 영상 속 움직임을 원형, 구멍, 서킷 같은 이미지로 풀어낸 책이에요. 작년 5월 무렵, 배은아 기획자로부터 장서영 작가의 영상 작업에 산재해 있는 구멍들을 추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메일을 받으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어요. 장서영 작가와는 이전에도 함께 작업한 연이 있어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을 접해왔고, 작업 전반에 묻어나는 특유의 위트를 늘 좋아했어요. 볕이 기분 좋게 들던 어느 날, 배은아 기획자의 사무실에서 두 분과 마주 앉아 ‘구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켜켜이 쌓인 종이 표면에 실제 책벌레를 풀어놓아 구멍을 뚫고 지나가게 하면 어떨지 상상하기도 하고, 슈퍼마리오가 곳곳의 파이프를 통해 불쑥 튀어나오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날 미팅 노트 한편에 이런 문장을 적어놓았더라고요. ‘길을 잃어버리기 위한 지도.’
영상 작업을 책으로 만든 과정이 궁금해요.
장서영 작가의 영상 작업에서는 화면 하단에 문장들이 흐르는데, 그 문장들을 읽다 보면 묵직한 울림과 함께 문득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와요. 저는 그 미묘한 감정을 책으로 옮겨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글자 크기와 간격, 놓이는 방향을 하나씩 조율하며 복합적인 정서가 시각적으로도 잘 전달될 수 있을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기획자는 작가의 16개 작업 속 텍스트를 해체한 뒤, 그것을 다시 11개의 새로운 주제로 엮어주었어요. 저로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독특한 구성을 물리적 공간 안에 어떻게 구현할 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죠. 처음에는 <Atlas>라는 제목에 맞게 지도에서 볼 법한 구체적인 지형이나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볼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직관적인 비주얼은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책을 읽는 흥미를 덜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어지는 페이지를 안내하는 숫자나 단순한 도형 기호처럼 지도에서 볼 수 있는 도식적 언어만 빌려오기로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디자인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고민을 거쳤나요?
11개의 주제 중 7개는 구멍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나머지 4개는 활자 자체에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디자인을 전개했어요. 기획자가 각 텍스트 안에서 구멍과 연결되는 핵심 단어나 어절을 표시해 주었고, 저는 거기에 규칙을 만들었죠. 단어는 첫 글자에, 어절과 문장은 시작과 끝 두 곳에 구멍을 내는 방식이었어요. 규칙은 단순했지만, 막상 시각화하는 과정은 치열한 변화와 선택의 연속이었어요. 문장의 의미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서로 다른 구멍들이 겹치지 않도록 위치를 잡아야 했거든요. 앞뒤 페이지를 쉴 새 없이 오가며 세밀하게 맞춰가는 수고로운 과정이었지만, 동시에 게임하는 것처럼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어요.
구멍의 위치와 규칙을 정하면서 독자가 어떤 방식으로 이 책을 읽어가길 바랐나요?
이 책에서 저는 ‘구멍을 설치하는 사람’의 입장이었지만, 독자에게 “여기가 출구이니 꼭 이쪽으로 가세요” 하고 외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제가 디자인을 하며 글의 의미를 곱씹고, 텍스트의 배치를 따라 흐르고 미끄러지고 튀어 올랐던 것처럼, 독자 또한 다음 구멍을 꿰어나가며, 혹은 꿰어지지 않더라도 다음으로 이어가는 상태 자체를 즐겼으면 했거든요. 처음 책을 펼친 독자 분들은 “이 구멍은 뭐야? 이 기호는 뭐야? 어떡하라는 거야?” 하고 당황하실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페이지를 넘기며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는 구멍을 발견하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어보며 탐험을 즐기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페이지를 거듭 오가며 완성한 <Atlas>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불리게 되었어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했나요?
책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은 너무 많아서 하나로 꼽기 어렵지만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는 비교적 명확해요. 책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관성적으로 무심하게 만들어졌다고 느껴질 때예요. 물론 과도한 무심함이 오히려 멋질 때도 있지만요. 그래서 디자인을 할 때는 그 안에 담길 콘텐츠에서 즐겁게 할 수 있는 동기를 찾으려고 해요. 그 동기는 처음 제안받을 때부터 표면에 드러나 있기도 하고, 직접 대상을 공부하고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발견되기도 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동기가 생기지 않으면 작업 과정이 지루해지고, 그렇게 만든 책은 그 마음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보이더라고요. 결국 디자인을 즐겁게 할 동기를 찾으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는 일상을 ‘잘 지내는 것’에서 생긴다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들과 잔뜩 떠들고, 맛있는 걸 먹고, 힘들어도 운동하고 잘 자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힘과 동기가 자연스럽게 생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