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이너 줄리 케겔스는 브랜드 설립 3년 차에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파리 패션위크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 2026 F/W 컬렉션은 겉모습을 테마로 마스크와 그림자 연출을 통해 인간의 모순된 자아와 만들어진 여성성의 이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 줄리 케겔스는 주얼리 스티커와 레이스 콜라주 패치처럼 익숙한 대상을 위트 있게 비틀며 고정되지 않은 뚜렷한 관점의 브랜드를 지향합니다.
“우아함과 취약함, 모순된 면모가 공존하는 여성성에 매력을 느낀다. 무엇보다 브랜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한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디자이너 줄리 케겔스(Julie Kegels)와 나눈 이야기.

먼저 축하를 전해야 할 것 같다. 2026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놀랍게도 브랜드 설립 3년 차에 이뤄낸 눈부신 성과인데, 소감이 어떤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도 들려주기 바란다. 꿈꾸는 기분이다.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후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됐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주 많은 것이 변했다는 걸 실감한다. 그렇다고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소규모 팀으로 일하며 수많은 작업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 벌써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생각 중이다. 아무래도 축하받고 기쁨을 누리기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더 익숙한 사람인 듯하다.
파리 패션위크에서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파리는 매력적인 도시지만 매 시즌 새로운 브랜드가 쏟아져 나오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기도 하다. 브랜드를 선보일 무대로 파리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파리는 패션의 역사가 깊게 새겨져 있는 동시에 그 틀을 살짝 뒤흔들어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규칙과 코드 안에서 작업하면서 그것들을 다시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게 할 미세한 틈을 찾는 작업이 즐겁다.
유럽, 남미, 아시아의 편집숍 36곳에 입점했다. 한국에서도 당신의 브랜드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브랜드가 말 그대로 급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 어떤가? 신나면서도 가끔은 상당히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모든 과정이 앤트워프의 작업실에서 이뤄지다 보니, 우리가 만든 옷을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입은 모습을 상상하는 게 아직은 낯설다. 하지만 우리가 의도한 맥락을 벗어나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 좋다. 그때부터 컬렉션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지 않을까? 누군가 옷을 사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매치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에서 훨씬 더 큰 흥미를 느낀다.

2026 F/W 컬렉션의 테마는 ‘겉모습(FaceValue)’이다. 런웨이에 선 모델들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거나 그 주변에만 메이크업을 한 모습이었다.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타인에게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드러낼 것인가 하는 고민,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착각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보통 마스크는 가리기 위한 도구지만, 역설적으로 무엇이 보이는지를 훨씬 더 의식하게 만든다. 마스크 가장자리에 더한 메이크업 역시 그 모순을 은유하는 장치다. 인위적인 이미지는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그 아래의 실제 인물은 어디서부터 존재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여성성을 바라보는 관점도 비슷하다. 옷과 메이크업, 주얼리, 제스처 등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는 수많은 코드가 존재한다. 이렇게 익숙한 요소를 살짝 비틀어 과장하거나, 그것들이 얼마나 만들어진 이미지인지 드러내는 방식을 즐긴다.

모델의 동선과 뒤로 비친 그림자의 움직임을 서로 다르게 연출한 점도 인상적이다. 그림자는 모델의 또 다른 자아다. 눈앞의 실체와 달리,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따르지 않는 상의 존재는 매력적이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표류하는 나 자신의 이미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나에게 패션쇼는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다. ‘겉모습’이라는 개념을 옷으로 직접 설명하지 않더라도, 공간과 연출이 숨은 디테일을 대신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데뷔 컬렉션 쇼에서 사용한 거울 설치물부터 2026 S/S 컬렉션의 베뉴인 지하철 고가, 이번 시즌의 그림자 월까지. 런웨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공간 구성에 특별히 애정을 갖는 이유가 있나? 패션쇼를 단순히 옷을 차례로 보여주는 선형적인 무대로 보지 않는다. 공간은 옷을 이해하는 관점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곳이다. 거울이나 소파같은 아주 단순한 오브제에서 시작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채우는데,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언가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을 선호한다. 옷을 만드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을 변형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익숙한 사물이나 공간에서 단 하나의 요소만 비틀어도 관객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지난 시즌에 흥미롭게 본 주얼리 스티커가 이번에도 등장했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고안한 아이디어가 브랜드만의 위트 있는 시그니처가 된 셈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한 주얼리를 실제로 제작하기엔 비용 부담이 컸다. ‘주얼리 없이도 주얼리를 보여줄 방법이 있을까?’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스티커는 민망할 정도로 명쾌한 해결책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가치와 영속성을 지닌 대상을 지극히 평평하고 일시적인 이미지로 전환하는 작업이었으니까. 스튜디오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처음에 원한 방향보다 타협안이 훨씬 흥미로운 경우 말이다. 이제 스티커는 액세서리와 이미지, 그리고 유쾌한 농담 그 어딘가에 위치한다. 귀중한 척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디테일이다.
자투리 레이스를 콜라주하고 스캔해 완성한 니플 패치도 신선하다. 니플 패치를 룩의 메인으로 활용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스튜디오에 남겨진 레이스 조각들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 아주 작은 형태로 콜라주하고 스캔해봤다. 니플 패치가 주는 특유의 친밀함에 끌렸다. 옷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아주 작은 물건이지만, 신체는 물론 ‘가림’과 ‘노출’이라는 경계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보통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할 대상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작업이 흥미로웠고, 이번 컬렉션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부친이 가방과 액세서리 사업을 한다고 들었다. 컬렉션을 준비할 때 조언을 구하기도 하나? 아버지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소재, 생산, 가격, 실용성 같은 비즈니스 메커니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감각을 익혔다. 다만 컬렉션의 창의적 결정에서는 내 직관을 믿는 편이고, 스스로 답을 찾으며 관점을 구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아버지는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지해준다.
지난 6월, 쿠르(COUR) 갤러리에서 <After Work>전시를 열었다. 패션을 넘어 전시라는 형태로 세계관을 확장한 이유가 궁금하다. 브랜드가 단순히 행어에 걸린 옷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패션쇼와 이미지, 캐스팅, 공간은 처음부터 하나의 세계관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몇 달을 공들여 준비해도 쇼는 15분 남짓이면 끝나지만, 전시는 관람객이 하나의 오브제나 이미지를 바라보며 스스로 의미를 연결해나갈 수 있다. 그 자유로움이 좋다. 어떤 아이디어는 몸 위에 얹어졌을 때, 또는 이미지 속이나 공간 자체에 존재할 때 가장 빛난다.
당신의 컬렉션에는 다양한 여성상이 등장한다. 컬렉션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궁극적인 인물상이 있나? 하나의 캐릭터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우아함과 우스꽝스러움, 절제와 취약함, 섹시함과 어색함 등 다채로운 여성성을 포착하는 데 흥미를 느낀다. 이 모순적인 면이야말로 아름다움의 본질이 아닐까. 단적으로 설명하기 쉬워지면 매력이 반감된다고 생각한다.
줄리 케겔스를 정의하는 미학적 키워드를 3개만 꼽는다면? 본능적인 것, 귀중한 것, 평범한 것(Instinctive, Precious, Ordinary).
디자이너로서 대중과 고객에게 어떤 브랜드로 기억되길 바라나? 브랜드의 잔상을 내가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아주 뚜렷한 관점을 가진 브랜드로, 옷을 알아보기 전에 특정한 느낌을 먼저 떠올려주길 바란다. 여성스럽고 정교하지만 어딘가 조금 불편하고 위트 있는 느낌.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은 채 그 묘한 긴장감을 유지해가고 싶다.
치열한 패션위크 일정을 소화하고 브랜드를 운영하는 도중 쉬는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 여전히 찾아가는 중이다. 브랜드 이름이 곧 내 이름이다 보니 일과 삶의 경계가 희미해지곤 한다. 잠시 쉬는 시간에도 작업으로 연결될 무언가를 습관적으로 떠올린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고, 목적 없이 거닐며,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는 평범한 일상이 더욱 소중하다. 영감을 얻으려고 애쓰기보다 이런 일상의 순간들이 작업에 훨씬 더 많은 자양분이 된다. 늘 흥미로운 일만 가득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때로 패션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유의 형태를 갖춰가는 줄리 케겔스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지난 3년 동안 우리 브랜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앞으로도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옷과 오브제, 이미지, 공간, 협업을 넘나들며 브랜드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것이 목표다. 규모가 작았을 때 느낀 친밀감과 호기심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성장이 단순히 물량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한다. 시도해보지 않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긍정적인 상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