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부드러운 말을 고르고, 단어마다 기억을 되짚어가며 진심을 담는다. 서울에서 만난 에르뎀 모랄리오글루(Erdem Moralıo lu)는 순수하고 뜨거웠으며 한없이 다정했다. 일과 삶, 아름다움에 대해 긴 대화를 마칠 무렵에는 에르뎀의 오늘이 그의 성정을 양분 삼아 무르익었음을 깨닫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INTERVIEW WITH
Erdem Moralıoğlu

지난봄, 에르뎀의 프런트 로에 앉아 쇼를 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우스가 지나온 20년의 세월이 한 권의 책처럼 펼쳐지며 오랜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번 쇼를 구상하며 어떤 날들을 보냈나? 20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지만, 잠시 멈춰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건 멋진 일이었다. 1년에 정확히 두 번씩 정규 쇼를 진행했으니, 벌써 마흔 번의 런웨이 쇼를 선보인 셈이다. 그 세월을 엮으며 ‘애니버서리 쇼’의 관념 자체를 뒤집어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옷을 마음 가는 대로 잘라 버리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토록 귀중한 것을 이상할 정도로 무심하게 다룬다는 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테마 역시 이전 컬렉션과는 달랐다. 보통은 특정한 인물을 한 명 떠올리고, 그의 삶을 마치 캐릭터를 연구하듯 파고드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번 쇼를 준비하며 먼저 떠오른 건 인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대화(an imaginary conversation)’라는 개념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영감을 준 무수한 뮤즈가 한 방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떤 일 이 벌어질까? 머릿속의 방이 그간 수집한 아이디어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일상적이지 않은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마치 생일 같은 설렘이 들기는 했다. 그런데 왜 나이가 들수록 생일을 챙기는 게 조금 머쓱해지지 않나.(웃음)
아카이브를 깊이 들여다보며 과거에 소중히 여긴 컬렉션 피스를 많이 마주했겠다. 그 중에서도 데뷔 쇼인 2006 F/ W 컬렉션의 화이트 플리츠 가운을 재해석하고 싶었다. 이 미 완성한 실루엣을 해체한다는 행위 자체도 마음을 끌었지만, 그게 첫 쇼의 첫 피날레 룩이라는 점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아카이브 피스를 실제로 자른 건 아닐 텐데. 기존의 디자인과 동일한 드레스를 다시 제작한 후 가공했다. 이번 쇼에 등장한 룩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통해 완성했다. 20년간 모아온 자수 샘플을 패치워크처럼 이어 만든 드레스 두 벌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 드레스가 등장했을 때, 많은 게스트가 탄성을 삼켰다. 자수는 플라워 모티프와 함께 에르뎀의 상징 아닌가. 원래 손으로 창조한 모든 것을 좋아한다. 불규칙하고, 기계로 찍어낸 것과 달리 불완전하기에 더 귀한 요소들 말이다. 자수 플라워 패턴을 흔히 ‘여성적’ 이라고 표현하지 않나.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라면 언제부터인가? (내가 기억하는 한) 항상! 여자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걷고 말하는지 관찰하는 일이 무척 즐거웠다. 아마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낮에는 하키 경기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빅토리아풍 소매를 몇 장씩 그려댔으니, 좀 엉뚱해 보이기도 했을 거다.
스케치한 옷을 만든 적도 있나? 물론이다. 처음 만든 옷 중 하나는 여동생의 바비 인형을 위한 드레스였는데, 2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책에도 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런 특정한 코드가 에르뎀을 규정하는 데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행어에 아무런 설명 없이 옷 몇 벌만 걸려 있어도, 그 안에 확립된 언어가 있다면 누구의 작품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않나. 명확하고 일관된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건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그것들이 무언가를 제한한다고 여기지 않을뿐더러 나의 모든 창작물이 언제나 그 언어 안에 숨 쉴 거라고 믿는다. 필체를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니까.
브랜드가 성공 궤도에 오르면 거대 패션 그룹에 편입되는 경우도 많은데, 지금까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무얼 얻었나? 사실 독립 디자이너로만 일해왔기 때문에 독립적이지 않은 상태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룹에 속해 일하는 것에 비해 본능적으로 어떤 능력을 익히게 되는 건 확실하다. 특히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려는 태도나 호기심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궁극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가치는 자유다. 에르뎀은 그 자유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신의 쇼 역시 자유 안에 머무는 듯하다. 상업적 테마를 좇지 않고, 오로지 당신이 매료된 한 인물의 세계관을 섬세하게 파고드니까. 과거를 통해 어떤 측면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좋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해도, 다른 렌즈를 통해 해석하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 컬렉션을 꾸리다 보면 테마 속 서사와 인물이 나를 자연스레 다음 페이지로 이끈다. 마치 새로운 장으로 초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줄곧 시대가 요구한 삶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여성들을 다뤄왔다. 현실에서는 어떤 캐릭터에 이끌리나? 과거의 여성들은 물론, 오늘날의 여성들에게서도 대조와 모순을 발견할 때 매혹된다. 이를테면 아주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에게 상당히 거친 면이 있다거나 하는 식일까?
그렇다면 당신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혹자는 당신을 심미주의자라고 표현한다. 우선 지나치게 정제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조금 이상할 정도로 독특한 특징을 가진 대상이 좋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무엇이 삶을 아름답게 바꿀까? 진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삶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또 웃고, 묻고, 호기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마음이란? 요즘은 공감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는다. 열려 있는 마음? 어쩌면 타인과 나의 차이를 관대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태도일 수도 있다.
공감은 때때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않나. 당신이 만든 멋진 옷과 같은 기능을 하는 셈이다. 디자이너로서 누군가가 입는 순간 스스로 더 멋져 보인다고 느끼는 옷을 만드는 건 일종의 사명이다. 그래서 패션이 흥미롭다.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삶을 직조하는 직물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달까.
누군가는 당신을 신비로운 인물이라 말하는데, 만나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다정하고 투명하다. 스스로 느끼기에는 어떤가. 음, 그냥 호기심이 많다. 창작 욕구도 강하고, 배우며 성장하고 싶은 열망도 크다. 지금은 창작 자체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일을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나? 평생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니까. 드레스를 그리는 데 빠져서 하키를 놓칠 정도로.(웃음)
창작과 삶을 분리하고 싶은 순간은 없나? 재미있게도 며칠 전 비슷한 문제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여성적인 것에 빠진 이유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자라온 환경 때문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삶과 창작은 너무나도 깊이 연결 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창작을 위해서라도 일과 분리될 줄 아 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느 쪽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테니까.
당신만의 ‘분리의 기술’을 알려준다면? 궁금증을 따라간다. 그럼 그 궁금증을 해결하는 시간은 일과 일이 아닌 것 사이의 여백이 된다.
그럴 때는 걱정에서 완전히 멀어지나? 그런 편이다. 갤러리, 좋은 책,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발레. 나를 작업실에서 끌어내주는 것들이 있다. 수영도 추천하고 싶다. 물속에서 호흡하고, 일정한 리듬으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자연스레 갇혀 있던 자신의 관념에서 빠져나오게 되거든. 인터뷰 직전에도 호텔에서 수영을 하고 왔다.
서울은 당신에게 각별한 곳이라고 들었다. 런던을 제외하면 첫 단독 매장을 오픈한 도시이기도 하고. 한국과 서울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서울에는 과거에 대한 존중과 미래를 향한 열정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재 사이의 밀고 당김 같은 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모순(full of beautiful contradiction)이랄까.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오픈한 두 번째 매장을 방문하는 것 외에 이번 방한에서 가장 기대한 건 무엇인가? 역시 탐험이다. 시장, 미술관, 갤러리,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헌책방. 어디에나 새로운 발견이 기다리고 있다. 나혜석의 작품에도 마음이 간다. 미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페미니스트이지 않나.
예술을 깊이 좋아하는 게 피부로 와닿는다.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큐레이터나 서점 주인? 영화감독이나 수영 선수일 수도 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신이 좋아하는 책과 영화가 궁금해졌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데릭 저먼(Derek Jarman)의 <모던 네이처(Modern Nature)>다. 작가가 죽음을 앞두 고 쓴 책인데, 그가 어떤 삶을 꾸리고,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 전하는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다. 데릭 저먼 재단과 협업해 프라이드 티셔츠를 만들었을 정도로 그를 존경해왔다. 영화는 베티 데이비스(BetteDavis)가 출연한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을 꼽고 싶다. 야망과 인생의 흐름,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을 조명한 작품이다.
<마리끌레르 코리아> 독자 중에는 당신의 뮤즈들처럼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젊은 여성이 많다. 20년에 걸쳐 여성이라는 주제를 파고든 당신이 정의하는 ‘진정으로 특별한 여성’이란 어떤 모습인가? 장점과 결점을 비롯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드는 모든 가치를 믿고, 아름다운 모순을 품은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종종 바꿀 수 없는 부분까지 통제하려고 애를 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 자체로 특별해지는 게 아닐까.
당신은 지금까지 선보인 컬렉션을 하나의 이야기, 혹은 책의 한 챕터처럼 묘사해왔다.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지금 에르뎀은 어느 챕터에 있나? 바라건대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부분이면 좋겠다. 책의 중간쯤, 스토리가 비로소 흥미로워지기 시작하는 대목 말이다. 슬퍼지는 끝도,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도입부도 아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