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계속해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춤(dance)과 같은 거예요.”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공,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에 숨을 불어넣어온 작가 패트리샤 피치니니(Patricia Piccinini). 수원시립미술관 올해의 국제전 <패트리샤 피치니니: 킨쉽>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와 경이를 담아 낯선 존재를 상상하는 일에 대해, 서로 다른 생명을 연결하는 돌봄과 공감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 ‘유령먹이에 대한 사유’, 단채널 HD 영상, 컬러, 스테레오 오디오, 4분 51초, 2025
패트리샤 피치니니, ‘바쳐진 존재’, 실리콘, 레진, 모발, 뉴질랜드 야생 주머니쥐 가죽, 15×8.5×11cm, 2009
패트리샤 피치니니, ‘평온한 동행’, 실리콘, 유리섬유, 자동차용 페인트, 레진, 모발, 29×59×60cm, 2022

패트리샤 피치니니가 이룩한 세계에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들이 산다. 인간과 동물의 신체가 뒤섞이고, 때로는 식물과 기계의 형질까지 한 몸에 깃든 이 존재들은 놀라울 만큼 사실적인 모습으로 관객 앞에 나타난다.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호주관 대표 작가로 참여하며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작가 패트리샤 피치니니는 1990년대부터 조각과 사진, 영상, 드로잉 등 여러 매체를 아우르며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 사이의 변화하는 관계를 탐구해왔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놓인 혼종적 생명체(이하 ‘키메라’)를 통해 생명 공학과 진화, 생식과 부모 됨, 돌봄과 공존을 둘러싼 질문을 끈질기게 확장해왔다. “진화의 시작, 그리고 인간과 기술, 자연이 맺는 관계에 관심이 있어요. 우리가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인 존재들과 연결되는 방식, 유전공학처럼 신기술을 통해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방식에도요.” 서로 다른 개체가 섞여 새로운 성질을 만들어내는 ‘혼종성’은 그가 오랜 시간 탐구해온 주제로, 키메라의 형상으로 구현된 피치니니의 조각들은 인간과 동물, 생명과 기계, 자연과 인공을 명확히 가를 수 있다는 우리의 낡은 믿음을 뒤흔든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 <패트리샤 피치니니: 킨쉽>은 피치니니가 오랜 시간 던져온 질문에 대한 응답인, 지난 20여 년의 여정을 한자리에 펼쳐 보인다.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제작한 작품을 총망라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놓인 키메라부터 식물과 기계, 사물이 뒤섞인 유동적인 형상까지 서로 다른 존재들이 전시장 곳곳을 채운다. 그의 작업에서 주요한 시각언어로 활용되어온 재료인 머리카락으로만 이루어진 연작 ‘스트랜드(Strand)’ 앞에서 마주 앉은 그는 “작품의 연대나 개념보다 ‘감정’을 따라 구성된 전시의 흐름이 특히 인상적이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1부에서 서로 다른 종과 사물이 결합하며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나는 장면을 만나고, 위층에서 이어지는 2부에서는 타인의 사적 순간을 엿보는 듯한 불편한 감정을 지나, 마지막 3부에 이르러 서로를 끌어안고 소중히 보살피는 존재들과 마주한다. “가능성에서 낯섦으로, 다시 친밀함으로 이동하는 관람의 경험이 마음에 들어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는지는 제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 ‘포옹’, 실리콘, 폴리우레탄, 가죽, 합판, 인모, 의류, 가변 크기, 2005 개인 소장
패트리샤 피치니니, ‘신생가족’, 실리콘, 아크릴, 인모, 가죽, 목재, 80×150×110cm, 2002 벤디고 아트 갤러리 소장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작품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키메라, ‘바쳐진 존재(The Offering)’다. 전시된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 작품은 낯선 생명체의 피부가 어떤 촉감을 지녔을지 궁금해하는 관객의 본능적 호기심을 먼저 해소해주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작가는 관객이 촉각을 통해 작품의 물질성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는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벗어나, 외형 아래에 깃든 이야기와 감정에 집중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제 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가 만지고 싶은 욕구라고 생각해요. 물론 사실적 표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물질성(materiality)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제 작품의 개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결과 공감, 차이에 대한 개념 말입니다.”

이토록 극사실적인 형상을 구현하면서도 자신의 작업은 물질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단언하는 작가의 태도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피부 위로 드러난 주름과 혈관, 머리카락 한 올, 주근깨 하나까지 정교하게 재현된 키메라들은 각 분야 전문가들과 길게는 수 개월에 걸친 협업 끝에 완성하며, 피치니니는 드로잉과 스토리보드를 기반으로 제작 과정을 총괄하는 감독의 역할을 맡는다. “말하자면, 계속해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오가는 춤(dance)과 같은 거예요.” 그는 말한다. “키메라를 만들 때 그런 디테일에 공을 들이는 건 이들이 실제 존재하는 생명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예요. 더욱 납작하게 혹은 비현실적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거죠. 하지만 동시에 이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게 중요해요.”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에 실재의 감각을 부여하되,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 자체는 소거하지 않는 것. 피치니니의 키메라는 이렇듯 현실과 비현실이 겹치는 경계의 공간, 즉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에서 태어난다. 이 모호한 경계 위에서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공, 생명과 기계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해온 우리의 익숙한 감각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눈앞의 존재가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가 처한 상황과 감정에 이입하는 순간, 관객은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피치니니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를 통해 현실의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신화의 본질적 기능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호주관에서 전시 <We Are Family>를 선보일 당시 그는 신화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실 세계를 설명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책임을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말하며, 자신 역시 “우리 시대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반영하는 신화적 존재들을 만들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신화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요한 서사적 장치다. “제가 키메라를 만드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이야기를 인간만을 통해 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현실의 문제를 인간의 형상으로 재현한다면, 관객이 어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그 무게에 압도될 거라 생각합니다. 신화와 판타지를 통해 우리는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채로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의미에 접근할 수 있게 되죠.”

패트리샤 피치니니, ‘의심하는 토마스’, 실리콘, 유리섬유, 인모, 의류, 의자, 100×53×90cm, 2008 맥클리랜드 미술관 소장
패트리샤 피치니니, ‘유대’, 실리콘, 유리섬유, 인모, 의류, 162×56×50cm, 2016

그러나 이토록 비현실적인 존재들을 탄생시키는 최초의 씨앗은 언제나 현실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제 모든 작품은 삶에서 제가 직접 경험하거나, 읽거나, 들은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1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조각 작품 ‘서포터(The Supporter)’는 도심 한가운데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새들의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다. “그 둥지에서 부화한 새끼들은 고층 건물에서 첫 비행을 했어요. 자연이 도시 안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죠. 도시를 인공적인 것이라 여기고 자연과 엄격히 분리하려는 우리의 태도에서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작가는 이 현실의 사건 위에, 형벌로 하늘을 떠받쳐야 했던 그리스신화 속 아틀라스의 이야기를 포갰다. “여기, 아주 유연한 요가 자세로 새들이 사는 둥지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가 있죠. 아틀라스는 신이 자신에게 가한 형벌에 분노했지만, 이 존재는 자신의 의지로 둥지를 기꺼이 들어 올립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이분법을 벗어나 유동적인 정체성을 지닌 이 존재는 그 자체로 자연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한다. “지금 우리가 가진 자연에 대한 개념은 인간에게만 이익을 줍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수많은 생물종은 돕지 못해요. 인간과 다른 생명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자연의 정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서포터’와 조화를 이루듯 나란히 전시된 조각 ‘어린나무(Sapling)’ 역시 현실에서 논의되어 온 ‘법적 인격(personhood)’의 개념에서 출발했다. 멜버른 교외의 한 주유소 앞마당에서 3백 년 넘게 자리를 지킨 유칼립투스가 고속도로 건설로 베일 위기에 처하자, 현지 원주민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모임에 참여한 자매에게 이 일화를 전해 들은 작가에게 이는 자연과 인공의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다가왔고, 이후 호수같은 일부 자연물에도 인간과 같은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법적 인격의 개념을 접하며 질문을 한 차원 확장했다. “식물에게도 같은 권리를 줄 수는 없을까요? 자신이 속한 땅에 대한 권리, 안녕을 누릴 권리, 지금껏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도 존재할 권리 말입니다.” 그 질문은 작품 안에서 식물과 인간의 형질이 뒤섞인 작은 생명체와, 그를 자신의 아이처럼 소중히 보살피는 인간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식물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고유한 삶과 권리를 지닌 존재로 바라보고, 나아가 서로 돌보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존재로서 상상한 결과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는 현실의 사건과 신화, 역사적 레퍼런스가 정교하게 교차하며 여러 층위를 이루지만, 작가는 관객이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작품의 배경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 흐르는 일관된 정서를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면 그저 형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형태조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고요. 적어도 이 존재들 사이에 강한 연결이 있다는 것, 인간이 이들을 매우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보살피고 있다는 것만은 모두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모든 작품이 ‘연결’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작가 패트리샤 피치니니

피치니니의 세계에서 서로 다른 존재를 하나로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은 ‘돌봄’이다. 전시 제목인 ‘킨쉽(kinship)’은 친족이나 혈연, 가족 관계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그의 작업에서는 인간 중심의 전통적 관계를 넘어 낯선 존재에게까지 관계의 범위를 확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과 다른 종의 생존 자체를 좌우하는 지금, 작가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킨쉽은 모든 종류의 차이를 포용하는 관계라 볼 수 있어요. 특히 기술을 통해 생겨나는 차이까지도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 작품을 통해 돌봄과 양육이라는 가치에 힘을 싣고자 해요. 그 가치를 중요하게 부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전시장을 배회하는 짧은 찰나에 이토록 낯선 존재에 마음을 열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 역시 자신의 키메라를 처음 마주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 애정이나 연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제게는 이 존재들이 경이롭게 느껴져요. 마음 깊이 아끼죠. 하지만 누군가는 작품 앞에 다가와 ‘저게 뭐야? 징그러워’ 하며 기겁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해요. 조금은 낯설기 때문에 두려울 수 있는 거죠.” 하지만 피치니니의 생명체에는 관객을 다시 작품 앞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단서들이 공존한다. 키메라를 보살피는 인간의 몸짓이나 사려 깊은 표정, 아름답게 다듬어진 머리카락 같은 요소 말이다. 작가는 이를 작품이 지닌 ‘밀고 당기는(push and pull)’ 힘이라 설명한다. “낯선 생김새에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끼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며 점차 공감하게 됩니다. ‘사려 깊은 존재일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며 다시 가까이 다가가게 되죠. 관객은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솔직한 감정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작품의 안과 밖을 오가게 됩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공간에서 이야기를 짓는 자신처럼, 작가는 관객 역시 일정한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이의 공간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피치니니는 이를 심리학의 ‘감정의 허용 범위(window of tolerance)’에 빗대어 설명했다. 지나치게 강렬한 자극은 우리를 감정에 압도되게 만들고, 그와 반대로 너무 익숙한 것은 어떠한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의 키메라는 양극단의 사이, 견딜 수 있는 만큼만 낯선 영역에 머문다. “저는 스토리텔러예요.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세상을 증오하거나, 자기 자신을 증오하거나, 겁에 질린 채로 전시장을 나서길 원하지 않아요. 그보단 관객이 자기 자신과 잠시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죠. 그게 예술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고, 미술관은 그걸 위해 존재하는 장소예요. 제 예술 역시 여러분이 스스로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가가 지나온 개인적 삶의 시간이 작업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묻자 그의 대답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를 향했다. “저는 이제 떠나가는 세대이고, 이 세계를 물려받는 건 제 아이들과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입니다. 제가 마음 깊이 아끼는 자연의 존재들, 북방털코웜뱃과 천산갑, 보노보와 각종 식물들이 사라져버린 세계를 그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누린 것을 다음 세대와 그들의 아이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기에 이토록 많은 노력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이어서 한층 격앙된 어조로 소셜미디어와 AI를 비롯한 기술이 젊은 세대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이야기하던 그는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소환하며 말했다. “메리 셸리의 이야기는 사랑받지 못하고,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한 존재가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다뤄요. 젊은 사람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존재를 바라보고, 관계 맺고, 돌보는 방식은 그렇게 피치니니가 써나가는 세계 안에서 조금씩 새롭게 쓰이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2026 국제전 <패트리샤 피치니니: 킨쉽>
기간 7월 23일~11월 1일
장소 수원시립미술관 2·3·4·5 전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