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담아낸 의도와 누군가의 인생이 끝내 교차하는 순간.
정연두 작가가 발현해온 예술적 공감의 힘.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알루미늄 오이’, 싱글 채널 4K 영상, 사운드, 컬러, 조각 설치
(색 조명, 알루미늄 캐스팅 조각 501개, 회전 좌대, 모터, 금속 구조물, 4채널 사운드),
59분 17초, 가변 설치, 2026. 경남도립미술관 커미션

거시적인 서사의 이면에 있는 ‘보통 존재들’의 삶. 정연두 작가의 작품은 누군가를 향한 관심 어린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는 전쟁, 재난, 이주 등을 둘러싼 역사적 사건과 담론을 개인의 이야기로 재편하며 과거를 호출하고 현재에 필요한 질문을 건네왔다. 사람들의 꿈을 이미지로 구현한 ‘내사랑 지니’(2001),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2007), 분단의 기억을 다룬 ‘DMZ 극장’(2021) 등을 거치며 확장된 그의 작업 세계는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되어왔다. 그 안에서 디아스포라의 삶에 꾸준히 주목해온 작가의 시선은 올해 7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개인전 <알루미늄 오이: 정연두>를 통해 한층 섬세하게 펼쳐진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에 새로운 터전을 일궈낸 고려인의 역사에서 출발한 이번 전시는 이동과 정착, 생존이라는 당시의 화두를 지금 우리의 삶까지 옮겨온다.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를 연결하며, 경계를 초월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정연두 작가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남서울 예술인마을의 작업실에서 만난 정연두 작가.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개인전 <알루미늄 오이: 정연두>가 열리는 경남도립미술관 앞마당에 마련된 ‘알루미늄 텃밭’에서 자라난 오이.

작업실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에게 이곳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작업실 옆 버스정류장이 ‘예술인마을’이고, 예술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슈퍼마켓과 미장원 등도 동네 곳곳에 있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건 서울의 남쪽 경계에 자리한 관악산의 풍경이고요. 세계 미술계의 극동, 그 안에서도 극남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상기시켜 주는 공간이에요. 이곳에서 작업한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습니다.

작업의 근거지는 서울이지만, 개인전 <알루미늄 오이: 정연두>는 창원의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죠. 마침 작가님의 고향이 경남 진주라고 들었습니다.

경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님에게 제가 진주 출신이라 이 전시를 하는 건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나’에 방점을 두고 이번 개인전을 준비했습니다. 한데 전시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창원 진동면에서 내가 태어났지.” 그래서 “그럼 전시 첫날에 오세요”라고 말씀드렸고, 난생처음 어머니를 제 전시의 개막식에 모셨습니다. 그날 사회자가 “오늘은 특별히 작가의 어머님께서 오셨습니다”라고 기습 소개도 해주셨어요. 덕분에 어머니가 참 행복한 하루를 보내셨죠.

너무나 뜻깊은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어머니가 신작 중 하나인 ‘알루미늄 오이’(2026)의 영상을 유독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고려인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인데, 비슷한 또래의 어르신이 많이 나오니까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알루미늄 오이’ 등 최초 공개하는 4점을 포함해 총 36점의 드로잉, 사진, 영상, 조각, 설치, 사운드 작업을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시죠. 전시를 관통하는 단어로 ‘고려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1937년 강제 이주 정책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떠난 고려인을 조명합니다.

고려인의 역사를 다루고 싶어 이번 작업을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극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됐어요. 고려극장은 강제 이주 상황에 처하자 최초 정착지인 카자흐스탄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던 한인들을 가리켜요. 1년에 무려 260회에 이르는 공연을 하는데, 대부분 <심청전>과 <흥부와 놀부> 같은 전통 고전이었어요. 모국어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공연할 때만큼은 우리말로 말할 수 있었죠. 그 점에 매료돼 그들의 정착기를 살피다 보니, 농사를 통한 정착에도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겼어요. 당시 고려인은 이주 직후 중앙아시아 곳곳의 불모지에 집단농장(콜호스)을 만들었어요. 사막 같은 땅에 물을 길어다가 얇게 깔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소중하게 간직해둔 볍씨를 심은 거죠. 우리에게 익숙한 논이 아닌, 마치 초록색 연못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작물을 잘 키워내 ‘노동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배출했다고 해요. 그 이야기가 참 멋있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들의 성공담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번 개인전을 구성했습니다.

전시의 대표작인 ‘알루미늄 오이’는 알루미늄으로 캐스팅한 501개의 오이 조각을 올린 대형 오브제, 앞서 언급한 고려인의 영상, 사운드가 어우러진 설치 작품이죠. 아까 작업실에 있던 오이 조각을 들어봤는데 꽤 무겁더라고요.

오이 한 개당 1kg 남짓이니 전부 합치면 약 500kg일 거예요. 작품을 구상할 때 오이 조각의 적절한 크기와 개수를 계산해보니 501개 정도 되더라고요. 각 오이의 표면에는 고려인 출신 뮤지션 빅토르 최(Viktor Tsoi)가 이끈 그룹 키노(KINO)의 곡인 ‘알루미늄 오이’ 가사를 해체한 771개의 러시아어 알파벳이 한두 개씩 새겨져 있어요.

가사를 새기고 곡 제목을 작품의 이름으로 쓸 정도면, 그만큼 이 작업과 중요한 접점이 있을 거라 짐작됩니다.

‘알루미늄 오이’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금속은 열매를 맺지 않아.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알루미늄 오이를 심잖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게 아이러니할 수도 있지만, 그게 황량한 지역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생존하던 고려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느꼈어요. 그들에게 상을 주고 싶었고, 그 트로피가 ‘알루미늄 오이’ 오브제예요. 영상 속 고려인이 노래를 부르면 오브제를 받치는 턴테이블이 회전하는데, 그때마다 전시장의 조명이 오이 표면에 반사되면서 트로피가 반짝반짝 빛납니다.

미술관 앞마당에 실제 오이가 자라는 텃밭을 마련한 게 흥미로웠어요. 노동과 기다림, 생명의 시간을 관람객과 공유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작가님이 직접 오이를 심으셨다고요. 이런 경험을 통해 농사짓는 마음을 느껴보셨나요?

그렇죠. 사실 농사는 잘 몰라요. 올해 초에 친환경 텃밭을 분양받아서 토마토와 바질, 딜, 오이 등을 키워본 적이 있는데 역시나 쉽지 않았습니다. 흙 표면이 드러나면 좋지 않다길래 낮게 심어두려 했던 클로버가 오히려 무성하게 자랐죠.(웃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메마른 토지를 개간하는 고려인들의 심경이 어땠을지 헤아려보고 싶기도 했어요.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연기 드로잉 – 균형’(일부), 종이에 그을음,
130×90cm(6), 2026. 경남도립미술관 커미션

농작물은 ‘연기 드로잉 – 균형’(2026)에도 등장하죠. 갈라진 땅과 다양한 농작물을 담아낸 여섯 장면으로 이뤄진 드로잉 연작입니다.

마른 땅에 웅 크린 채 자라나는 오이, 호박, 옥수수 등의 식물을 그렸어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제 텃밭 등지에서 자라던 농작물이에요. 못생겨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보면 되게 예쁩니다. 원래 열두 폭의 밭 풍경 을 만들려고 했는데, 6점을 완성해 전시하게 됐어요.

작품 캡션을 보니 ‘종이에 그을음’으로 그렸다고 적혀 있어요. 그을음이라는 소재가 생경한데, 이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1~2년 전부터 그을음을 다루고 있어요. 등유를 태울 때 올라오는 시커먼 연기를 종이에 씌운 후, 가는 붓으로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그려나갑니다. 어두움을 지워내는 행위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완벽히 닦아내고 싶어도 얼룩이 남고, 잘못 건드리면 지문 같은 흔적이 담길 수도 있 어요. 연약하고 일시적인, 덧없는 재료 같아요. 그럼에도 작품이 형상을 유지한다는 점이 마치 경계선 위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이룬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게 요즘 제 작업 세계와도 잘 맞는다고 봅니다.

그 균형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삶을 이어가고자 했던 고려인의 의지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시 전반에 음악이 함께한다는 점도 인상 깊습니다. 음악이 미술 안에서 어떤 힘을 지닐 수 있다고 보시나요?

음악은 언어가 발휘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음악을 통해 어떤 선을 넘어설 수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 힘을 믿으면서 최근 작업에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이번 전시작을 예로 들면, 열대식물 형태의 설치 작품인 ‘상상곡’(2023)에서는 재한 외국인의 속삭임과 함께 존 레논의 ‘Imagine’을 편곡한 뱃고동 소리가 흘러나와요. ‘피치 못할 블루스’(2025)는 5명의 연주자가 각자 즉흥적으로 풀어낸 12마디의 블루스 연주를 느슨한 합주처럼 동시에 들려주고요. 신작인 ‘산조 열차: 1937’(2026)과 ‘발효 산조’(2026)는 가야금 산조를 더했습니다.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산조 열차: 1937’, 2채널 4K 비디오, 컬러, 사운드,
12분 15초, 가변 설치, 2026. 경남도립미술관 커미션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발효 산조 醱酵散調’(일부) 전시 전경,
12채널 항아리 조명과 사운드 설치 (전체 60개 항아리),
혼합 매체, 11 분 52초, 가변 설치, 2026. 경남도립미술관 커미션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바실러스 초상’(일부), 컬러 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 액자, 45×33cm, 2025

두 점의 신작에서 산조 연주가 어떤 역할을 하기를 바라셨나요?

작품에 담긴 가야금 산조를 들어보면, 굉장히 느린 진양조로 시작했다가 자진모리, 휘모리로 이어지면서 점점 빨라져요. ‘산조 열차: 1937’의 경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는 열차 속 풍경이 격앙돼가는 산조와 어우러지면서 이주하는 고려인의 감정에 더 이입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산조를 한자로 표기하면 ‘흩어질 산(散)’ 자를 쓰는데, 이 또한 디아스포라와 맞닿아 있다고 봅니다.

공연장이 아닌 미술관에서 재생되는 음악은 작품 설치 환경도 고려해야 하죠. 특히 ‘발효 산조’가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 같습니다.

포항에서 가져온 60개의 항아리로 공간을 가득 채웠고, 그중 12개는 내부에 스피커를 설치해 가야금 현으로 치환했어요. 아주 섬세한 조율이 필요했어요. 관람객이 ‘발효 산조’ 전시실에 들어와 항아리 사이를 걸어 다닐 때 가야금 소리가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항아리의 높이와 그 안의 울림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등을 두루 고려했죠. 음악 자체도 노가다에 가까운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쳤습니다.(웃음) 12개의 항아리에 열두 현의 소리를 각각 담았고, 수많은 음을 하나하나 분절하듯이 작업 했어요. 녹음을 스튜디오에서 했다면 훨씬 깔끔했을 텐데, 수백 개의 된장 항아리가 있는 산골짜기의 장원으로 굳이 내려갔어요. 녹음을 시작해 “또동~” 소리가 날 때마다 하필 새가 울고, 개가 짖고….(웃음)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연주를 맡아주신 박경소 선생님은 된장이 발효되는 현장에서 무언가를 느끼면서 연주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덕분인지 항아리들이 내는 음과 빛, 된장 향까지 어우러져 발효의 느낌을 물씬 전해요. 발효에 대한 관심은 ‘발효 산조’와 한 공간에 전시된 사진 연작 ‘바실러스 초상’(2025) 등에서도 엿보입니다.

‘바실러스 초상’에서 울퉁불퉁 못생긴 메주 위에 피어난 바실러스 균은 마치 도깨비 같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어요. 익숙한 메주로 보일지, 아니면 낯선 초상 사진으로 보일지는 관람객의 몫이겠지만요. 메주의 흰 부분을 먹어보면 크림처럼 부드럽고 맛있어요. 첫해에는 맛이 좋지 않았지만 청명한 자연 속에서 십여 년의 시간을 거치며 특유의 풍미를 갖게 된 거죠. 제가 작업실에서 가끔 막걸리를 만드는데, 그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정성껏 빚어봤자 환경에 따라 맛의 차이가 크죠. ‘인간이 온전히 관여할 수 없다’는 발효의 특성이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을 받아 들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메주나 막걸리 기포, 사워도 반죽 같은 발효 이미지를 작업에 활용해왔습니다.

‘어쩔 수 없음’을 수용하는 자세는 변수가 생기기 쉬운 작업 과정에도 필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작업은 소재와 기법, 방식까지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평소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계하시는 편인가요?

즉흥의 매력은 잘 짜여진 계획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고, 미리 적극적으로 설계해두면 작품의 완성도도 높아지겠죠. 하지만 세상 일이 란 게 바라는 대로만 되지 않기 마련이니, 막상 작업에 돌입하면 머릿속에 그려둔 것에만 매달려서는 안 돼요. 일어나는 일들을 내버려두고,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제 작업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더군다나 제 작업에는 사람이 많이 개입되잖아요. 그들을 왜 다뤄야 하는지, 어떻게 다가가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조밀하게 생각하지만, 그 만남을 통해 무언가를 감각하고 표현하는 데는 상당히 열려 있는 편이에요. 과정을 촘촘히 쌓아가면서도 허용도 는 넓히는 거죠.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태도를 기반으로 인터뷰를 비롯한 ‘관계 맺기’를 통해 작업해가는 마음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그 과정에서 소통의 영향력을 실감하시기도 하죠?

네. ‘알루미늄 오이’ 영상 후반부에 할머니들이 “친구여~”라며 노래를 불러요. 에어로빅 교실에서 인터뷰하던 중, 한 할머니가 본인이 합창단 단원이라며 이번 주말 연습 때 와서 찍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날 저녁에 서울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도 무리해서 진행했죠. 할머니들이 의상까지 여러 번 갈아입으며 온갖 공을 들여주시다가 촬영을 마칠 무렵에 “한 곡만 더 하겠다” 하시고는 그 곡을 부르는데, 제가 울컥해버린 거예요. 어느 정도면 참았을 텐데 쪽팔리게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는…(웃음) 그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수개월 동안 고려인의 이주 역사에 대해 찾아보고,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인터뷰한 뒤 마지막 날에 그분들이 정성껏 불러주는 한국 노래를 듣게 되기까지의 맥락이 노래보다 더 슬프게 와닿았어요. 이런 순간들이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얻는 큰 힘이자 자극적인 경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알루미늄 오이’ 영상 스틸, 싱글 채널 4K 영상, 사운드, 컬러, 조각 설치
(색 조명, 알루미늄 캐스팅 조각 501개, 회전 좌대, 모터, 금속 구조물, 4채널 사운드),
59분 17초, 가변 설치, 2026. 경남도립미술관 커미션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이전에도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작품을 다수 선보이셨습니다. 그 작업이 단순한 역사적 재현에 그치지 않기 위해, 재현과 창작의 경계에서 유의하시는 점이 있다면요?

디아스포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에게서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찾는 데 초점을 두곤 하잖아요. 그런데 그 화두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왔을 땐 ‘대체 작가가 디아스포라와 무슨 연 관이 있길래 그들의 삶을 다루느냐’라는 의문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특히 매체가 영상인 경우, 작가 스스로 섬세한 관점을 지니지 않으면 피상적인 작업에 머무르기 쉽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가닿을 수 없을 거예요. 제가 디아스포라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의 기구함이나 형용할 수 없는 숙연함에 있지 않아요. 약 100년 전의 역사를 예술 안에서 마주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예술적 상상력이 나와 타인을 이어주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해요. 내 주변부터 나와 가장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까지 예술을 매개로 연결할 수 있는 거죠.

최근 “무관한 사람들의 얘기에 관심을 더 갖게 됐다”고 말씀하신 게 떠오릅니다. 교집합이 없는 듯한 이의 삶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음, 혹시 아파트에 거주하시나요? 위층에 누가 사는지 아세요?

모릅니다.(웃음)

우리는 보통 위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하지 않지만, 그들도 동일한 구조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잖아요. 예전에 ‘상록타워’(2001)라는 작업을 통해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32가구 의 가족 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어요. 그 결과물을 전시할 때 사진에 담긴 분들이 직접 오셨는데, “608호는 우리 집이랑 구조가 같은 데도 저렇게 하고 사는구나” 하면서 이웃의 집을 관심 있게 보시더라고요. 그게 사진이나 영상을 비롯한 매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비슷한 것 같아요. 나와 무관한 듯하더라도 결국 내 경험과 삶, 나 자신을 거울처럼 비춰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고 봅니다.

작가님의 작품이 그런 거울이 되어주었다고 느끼셨던 경험이 있다면요?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정연두 – 백년 여행기>를 계기로 교류하게 된 독일인 관람객이 있어요. 얼마 전, 창원 전시 준비가 한창일 때 그가 장문의 메일을 보내온 거예요. 출력하면 30장에 달할 정도로 긴 글이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어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낯선 나라에서 어려움을 겪던 중 우연히 들어간 미술관에서 네 전시 를 보고 감동했다. 특히 ‘날의 벽’(2023) 앞에 서자 ‘통곡의 벽’이 떠오르며 내가 숨겨왔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마주하게 됐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었는데, 그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는 설명할 수 있다.” 그 친구의 인생과 제가 작품에 담아낸 생각이 서로 다른 선상에 있다가 어느 지점에서 교차했다는 게 뜻깊더라고요.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통해 공감이 생겨나는 게 저한테는 정말 중요합니다. 작품이 각자의 사정과 만나는 순간들이 참 소중해요.

배제와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예술을 통한 공감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요?

올해 2월 트럼프가 전쟁을 일으키자 SNS에 현지 상황을 찍은 영상들이 숱하게 올라온 게 떠오르네요. 미사일이 쏟아지고 건물이 파괴되는 소리가 무척 클 텐데, 카메라는 안정적이었어요. 사람이라면 그렇게 찍을 수 없겠죠. 실제로 당시 AI로 조작한 영상이 많았다고 해요.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이 이미지로 만들어져 소비되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헷갈리는 상황에 이르면, 우리가 잃는 건 무엇일지 생각해봤어요. 답은 ‘공감 능력’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 누군가의 불행에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이 위협받는 장면을 마주해도 충격받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런 무감정의 상태에 빠지지 않고 마음을 기울일 기회를 더 만들어주는 것. 그게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전이자 미덕이 아닐까 싶어요.

예술의 세계에서 살아온 기간이 어느덧 30년에 이르죠. 그만큼 작품 수도, 활동 범위도 꾸준히 확장돼왔습니다. 지난 궤적을 돌아보면 어떠신가요?

예술이 작가에게 주는 무게가 있어요.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는 마음과 한 번 선보인 작품은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오곤 합니다. 오래전 작품을 이제 와서 다시 보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제대로 할 걸’ 싶은 지점이 많이 보이거든요. 그런데 ‘현재의 나는 기술적으로 훨씬 나아졌으니 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가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웃음) 그 시절에는 그때 나름의 에너지가 있었을 테니까요.

매 순간 최대치의 에너지를 절실히 쏟아내며 오늘에 당도하셨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니에요.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어요.(웃음) ‘알루미늄 오이’를 작업할 때, 가장 큰 힘듦이 한 고려인 할머니의 인터뷰 번역이었어요. 1시간 30분이 넘도록 대화를 나눴는데 고려말과 러시아어를 기가 막히게 섞어 쓰시는 거예요. 어느 언어의 통역가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죠. 어디까지가 한 단어인지도 모르는 그 말씀을 짧게 끊어서 일일이 번역하고 대조하며 문장을 맞춰갔습니다. 작심하고 시작했지만, 무척 괴로웠어요. 그런데 ‘내가 언제 또 누군가의 말을 토씨 하나까지 듣겠다고 애써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면 집중력이 되살아나더라고요. 그렇게 며칠간 밤낮없이 할머니의 영상을 들여다봤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런 마음을 절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작가의 작업실에 있던 ‘알루미늄 오이’ 오브제 모형
정연두 작가 미술 아트 jungyeondoo 마리끌레르 MarieClaire art
정연두, ‘알루미늄 오이’, 싱글 채널 4K 영상, 사운드, 컬러, 조각 설치
(색 조명, 알루미늄 캐스팅 조각 501개, 회전 좌대, 모터, 금속 구조물, 4채널 사운드),
59분 17초, 가변 설치, 2026. 경남도립미술관 커미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