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스는 아름다움과 노동, 소유와 욕망의 역사를 품은 채 순수함과 관능미를 동시에 드러내는 다면적인 패션 소재입니다.
- 이번 시즌 패션 하우스들은 블랙과 순백의 레이스를 대담하게 활용하거나 과거 아카이브에 결합하여 다채로운 변주를 선보였습니다.
- 최근에는 실리콘 코팅이나 3D 프린트 같은 신기술과 결합하며 레이스가 장식적인 한계를 넘어 혁신적인 표면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가장 섬세하고도 강렬한 직조. 2026 F/W 시즌, 욕망을 깨우는 레이스에 대하여.








레이스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가느다란 실이 서로 교차하고 포개지며 만들어내는 작은 틈.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피어나는 꽃과 잎, 유려한 곡선과 기하학적 문양을 품은 신비로운 아름다움.
지난여름, 스위스 장크트갈렌(St. Gallen)의 텍스타일 뮤지엄에서 마주 한 레이스 앞에서 좀처럼 발길을 떼지 못한 적이 있다. 수 세기 전, 이름 없는 장인이 손으로 완성했을 아이보리색 레이스. 짙은 바탕 위에 놓인 커다란 원형 장식물의 중앙에는 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기하학적 문양이 자리했고, 그 주위를 따라 꽃과 잎이 정교한 대칭을 이루며 무수히 반복되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 작품을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이면에 켜켜이 쌓인 고된 노동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순간 문득 레이스의 뼈아픈 역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16세기에 탄생한 레이스는 사실 처음부터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다. 정작 그것을 만들어낸 무명의 여성과 장인들조차 자신이 직조한 레이스를 평생 입거나 소유하기 쉽지 않을 만큼 값비싼 소재였던 것. 이처럼 레이스의 역사에는 아름다움과 노동, 소유와 욕망이 복잡하게 얽힌 역설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 때문일까? 레이스는 한 가지 성격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하고 신비로운 소재로 자리 잡았다. 순수하면서도 관능적이고, 연약해 보이면서도 파괴적일 만큼 강렬한 소재. 패션 하우스가 오랫동안 레이스를 사랑한 이유 역시 바로 이처럼 특별하고 다면적인 매력 때문일 것이다.
레이스는 시대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얼굴로 활약해왔다. 순결과 낭만을 상징하는 웨딩드레스를 장식하기도 했고, 쿠튀르의 정교한 장인정신과 럭셔리를 드러내는 매혹적인 소재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몸을 감싸는 동시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란제리처럼 관능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 레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모습과 변주를 통해 런웨이 위에서 눈부신 활약을 이어갔다. 구찌의 뎀나와 펜디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각자의 데뷔 쇼를 위해 대담하면서도 정교한 블랙 레이스 카드를 꺼내 들며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켰다. 이에 반해 가브리엘라 허스트와 끌로에의 셰미나 카말리는 순백의 레이스를 통해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노스탤지어를 환기했고, 디올의 조나단 앤더슨은 섬세한 레이스를 과거 아카이브에 결합해 새로운 해석을 더하기도 했다. 이번 시즌 주목할 것은 패션 하우스가 레이스를 대하는 태도 역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 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는 강인한 블랙 수트 사이에 실리콘을 입힌 란제리 드레스를 대거 등장시켰다. 매끈하고 인공적인 표면의 레이스는 더 이상 연약하고 장식적인 소재에 머물지 않는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로에베의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 듀오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레이스를 3D 프린트와 라텍스 캐스팅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결합해 한층 입체적인 형태로 구현한 것. 과거 인간의 손끝에서 탄생한 섬세한 직조는 이제 혁신과 기술을 통해 전혀 다른 표면을 획득하며 레이스를 새롭게 정의하기도 했다.
과거의 레이스가 소유의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의 레이스는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시즌은 어떤 레이스를 선택하고 무엇과 결합하며, 어떤 방식으로 여성의 몸 위에 펼쳐낼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대목으로 떠올랐다. 시대는 변했고, 레이스의 얼굴도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작고 미세한 틈 사이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만큼은 여전히, 찬란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시대를 관통하며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