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한층 넓어진 지평 위에서 서른한 번째 축제의 서막을 연다.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신작과 비범한 신예들의 수작부터 영화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고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까지, 올해 부산을 채울 다채로운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열흘간 이어질 영화의 향연 속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저마다의 한 장면을 품어가길.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
WRITER 정시우(영화 저널리스트)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가 이토록 자연스러운 배우가 또 있을까?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의 얼굴이자 한 시대를 대변해온 배우 안성기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특별기획 프로그램 <아름다운 시절, 안성 기>를 마련한다. 1백80여 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 가운데 무엇을 다시 꺼내 볼 것인가에 대한 답은 배우 자신에게서 발견했다. 이번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배우 안성기가 생전에 직접 대표작으로 꼽은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 임권택 감독의 <축제>까지, 6개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잇는다. 안성기가 배우로서 가장 활발하게 스크린을 누빈 시기인 동시에, 한국 영화가 아름다운 성취를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배우 안성기의 연기 인생은 두 번의 출발을 거쳤다.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뒤 아역 배우로 활동했고, 이후 긴 공백을 지나 1970년대 후반 성인이 된 후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당시 한국 영화는 검열과 제도적 통제 속에서 긴 침체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현실과 시대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담아내려는 혁신적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배우 안성기는 그 변화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 임권택 같은 감독들을 중심으로 ‘코리안 뉴 웨이브’가 열리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포착했고, 배우 안성기의 얼굴은 세계와 관객을 잇는 중요한 매개가 됐다.


눈여겨볼 점은, 배우 안성기가 출연한 당대의 현실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에서 그는 좀처럼 영웅이나 투사의 역할로 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람불어 좋은날>에서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가 되어 급변하는 도시와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청춘을 보여주고, <고래사 냥>에서는 부랑자 민우의 자유분방한 얼굴로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잠시 기댈 어깨 같은 인물이 되었다. <칠수와 만수>에서는 가난과 연좌제의 굴레 속에 살아온 만수를 통해 개인을 짓누르는 당대 사회의 그림자를 드러냈다. 그는 방황하는 청춘의 대변자이자, 시대를 투영하는 지표였으며, 억압된 시대에 우리를 다독이는 존재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뇌하는 지식인, 평범한 소시민 등 다양한 캐릭터를 넘나들었다. <개그맨>에서는 스스로를 천재 영화감독이라 믿는 삼류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로 페이소스 짙은 희비극을 선보이고, <하얀전쟁>에서는 베트남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을 맡아 전쟁의 광기와 허무를 처절하게 묘사했으며, <축제>에서는 모친상을 치르는 작가 준섭을 통해 죽음과 가족, 의례를 둘러싼 한국인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담담하게 육화해냈다.
생전 안성기는 자신의 캐릭터가 대중에게 사랑받은 이유를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상에 잘 맞아떨어지는 인물들이어서”라고 돌아본 바 있다. 이와 동시에 안성기의 얼굴은 당대가 어떤 인물을 원하고 있는지, 나아가 그 시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비춰냈다. 그에게 ‘한국 영화의 페르소나’라는 수식어가 오래 따라 붙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개 한 감독의 분신을 뜻하는 ‘페르소나’ 앞에 특정 연출자가 아닌 ‘한국 영화’가 놓였다는 사실은 그가 한 명의 배우를 넘어 한국 영화의 한 시대를 상징하는 얼굴로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시 절, 안성기>는 6편의 대표작을 통해 한 배우의 시간을 돌아보는 동시에, 그 얼굴에 새겨진 한국 영화의 역사와 다시 만나는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