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한층 넓어진 지평 위에서 서른한 번째 축제의 서막을 연다.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신작과 비범한 신예들의 수작부터 영화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고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까지, 올해 부산을 채울 다채로운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열흘간 이어질 영화의 향연 속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저마다의 한 장면을 품어가길.
경쟁을 너머, 그다음으로
WRITER 차한비(영화 기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30주년을 맞아 신설한 경쟁 부문이 두 번째 막을 올린다. 한국과 일본, 중국, 대만, 이란,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에서 제작된 13편이 부산 어워드를 두고 겨룬다. 첫해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자리였다면, 이제는 이 부문이 어떤 영화적 태도와 시선을 지지하고 아시아 영화의 현재를 어떻게 진단할지 한층 선명하게 보여줄 차례다. 올해 경쟁작에는 세계 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부터 첫 장편을 내놓은 신예까지 두루 포진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과 이제 막 자기만의 길을 내기 시작한 감독이 한자리에 모이는 셈이다. 서로 다른 궤적을 걸어온 이들의 영화가 부산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주치고 교차할지 지켜보는 것 또한 경쟁 부문의 색다른 즐거움이다.


경쟁작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자신의 세계를 다져온 이름은 단연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다. <천국의 아이들>을 통해 이란 영화를 세계 관객에게 알린 그는 <천국의 색깔> <바란> <태양의 아이들>을 거치며 어린 존재의 눈으로 가난과 노동, 교육의 불평등을 바라봐왔다. 신작 <빵과 책>에서는 그 시선을 성인의 자리로 옮겨 익숙한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아이들의 끼니와 수업을 책임져야 하는 교사를 앞세워 공공의 책임이 개인의 선의에 맡겨진 현실을 들여다본다. 영화의 시선이 성인에게로 옮겨가면서 선의와 자기 합리화를 구분하기 어려운 윤리 문제도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 지점에서 <빵과 책>은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될 만하다. 거장의 신작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구유 감독의 <처음 만난 외로움>은 한 작가의 영화적 여정이 매듭지어지는 종착지다. <푸춘산의 삶>과 <초목인간>을 거치며 그는 중국 회화의 산수 개념을 동시대 도시와 가족의 삶으로 옮겨왔다.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도시와 그 안에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을 함께 담아낸다. ‘산수 영화 3부작’을 마무리하는 이번 작품에서 감독은 상실을 겪은 여성 삼대로 시선을 옮긴다. 여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여러 작품을 촬영한 다키모토 마키야 촬영감독이 합류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일본 가족영화 속 일상의 풍경을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온 촬영감독과 중국 풍경을 새롭게 구성해온 감독의 만남은 3부작에 새로운 결을 더한다. 작가영화와 대중영화를 오가며 중국 영화의 한 시대를 통과한 배우 저우쉰의 얼굴이 그 풍경의 중심에 놓인다.
<바다에 새겨진 이름>에서는 요셉 앙기 노엔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오늘날 인도네시아 영화의 야심이 함께 확장된다. 그는 수하르토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 실종된 시인 위지 투쿨을 다룬 <솔로, 고독>과 권력이 만든 이미지와 개인의 몸을 기이한 우화로 풀어낸 <공상의 과학>을 통해 국가권력이 개인의 존재와 기억을 지우는 방식을 탐구해왔다. 신작에서는 인도네시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바탕으로 1990년대 강제 실종 사건을 큰 화면에 옮긴다. 원작자 레일라 S. 추도리 작가가 공동 각본과 제작에 참여했고, 전작 <가스퍼의 24시간>에서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배우 레자 라하디안이 주연을 맡았다. 여기에 배우 디안 사스트로와르도요와 크 리스틴 하킴 등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배우들과 신생 제작사 ‘Pal8 픽처스’가 합류했다. 한 감독이 오래 붙들어온 정치적 기억과 스타 배우의 대중성, 새로운 제작사의 야심이 한 작품 안에서 융화한다.

히로세 나나코 감독의 <비트윈 투 러버스>에는 현대 일본 영화의 흥미로운 계보가 겹쳐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니시카와 미와 감독의 작품에 조감독으로 참여하고 제작사 분부쿠에 합류한 그는 <여명>에서 혈연 바깥의 부자 관계를, <책 종이 가위>에서 북 디자이너의 창작과 노동을 바라봤다. 두 번째 극영화에서는 그 관심을 비전통적인 사랑과 가족의 형태로 확장한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선정작이 경쟁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의미 깊다. 배우 나가사와 마사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배우 에모토 다스쿠와 이시바시 시즈카는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관계의 미세한 떨림을 표현했다. 서로 다른 작품에서 각기 다른 관계를 연기해온 세 배우가 이번에는 한집에 모여 독특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변화하는 가족을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기술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관계를 다룬 수작 중 하나다.
낯선 이름을 발견하는 것이 경쟁 부문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면, 부산이 새롭게 소개하는 우즈베키스탄의 보티르 압두라흐마노프 감독의 작품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힐롤>은 한때 태권도 선수였지만 가족을 돌보는 일에 붙들린 젊은 여성을 통해 성별에 따라 주어지는 역할과 의무를 고찰한다. 인물을 가까이 뒤쫓다가 광활한 풍경 속에 홀로 남겨두는 카메라는 한 사람의 몸에 쌓인 감정과 그를 에워싼 세계의 크기를 한 화면에 담아낸다. 새로운 세대의 움직임은 다나카 미키 감독의 첫 장편 <실버 익스프레스>에서도 이어진다. 전작 <진저 보이>로 칸영화제 라 시네프 부문 공동 3위를 차지한 뒤 곧바로 장편 경쟁에 진입한 감독이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기존의 연애 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방식과 관계를 함께 다루며, 익숙한 관계의 규범 밖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해외 작품들에서 나타난 새로운 움직임은 한국 영화에서도 이어진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제작한 임하연 감독의 장편 데뷔작 <그날의 태주>는 배우 박한솔과 김우겸의 생기, 배우 예수정의 단단한 존재감이 만나는 작품이다. 염규복 감독의 <긴긴밤>은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받은 루리 작가의 동화를 99분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 어린이문학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 배우의 목소리를 얻어 얼마나 넓은 세계로 뻗어갈지 기대를 모은다. 김정훈 감독의 <면도>는 <들개> 이후 13년 만의 장편이 자 배우 변요한과의 재회라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배우 노정의와 카사마츠 쇼가 광기 어린 심리극을 펼치고, ITZY의 멤버 류진이 스크린 연기에 나선다.
거장이 숙고해온 질문, 3부작을 완성하는 마지막 획, 정치적 기억을 되살리는 협업, 부산으로 돌아온 프로젝트, 패기와 개성이 돋보이는 데뷔작까지 올해 경쟁 부문에는 저마다 다른 세월과 사연이 포개져 있다. 완결성 있는 영화 세계를 이룩한 거장과 이제 막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예가 겨루는 풍경은 그 자체로 생생한 긴장감을 구축한다. 그러나 경쟁의 묘미는 단지 순위를 가리는 데만 있지 않다. 익숙한 이름에서 뜻밖의 변화를 확인하고, 훗날 오래도록 기억할 이름을 한발 앞서 발견하는 일 또한 영화제가 안기는 즐거움이다. 극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 각자의 시간을 건너온 작품들은 비로소 현재형이 된다. 아시아 영화의 오늘을 가늠하고, 그 너머에서 시작될 다음 장면을 가장 먼저 마주할 기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