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한층 넓어진 지평 위에서 서른한 번째 축제의 서막을 연다.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신작과 비범한 신예들의 수작부터 영화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고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까지, 올해 부산을 채울 다채로운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열흘간 이어질 영화의 향연 속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저마다의 한 장면을 품어가길.

세계라는 감각

WRITER 이윤영(시네마토그래프 대표)

월드 시네마는 비아시아권 중견 작가와 신인 감독의 신작, 주요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두루 소개하는 섹션이다. 기성 감독의 신작부터 새롭게 떠오르는 감독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아우르며 앞으로 주목할 새로운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마리가 뭐 어때서>

전작 <퀸 오브 하츠>에서 도덕적 금기와 욕망에 관한 파격적인 서사를 선보였던 덴마크의 영화감독 마이 엘투키의 <마리가 뭐 어때서>는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작품이다.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덴마크 코펜하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모두에게 숨겨야만 하는 마리의 비밀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날 위기에 놓이며 안정된 삶이 붕괴될 것이란 불안에서 시작해, 개인의 삶을 압박하던 전후 남성 중심적 사회 분위기의 양상을 드러낸다.

<그날 밤, 클라리사에게>

<가바초 챔피언>은 멕시코를 떠나 미국으로 향한 청년의 여정을 담는다. 호나스 쿠아론 감독은 멕시코 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아들로, <그래비티>의 공동 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멕시코 사회와 이주민의 삶을 강렬한 활기와 에너지로 구성한 전작에 이어, 현실의 무게를 경쾌하게 풀어내는 특유의 연출이 효과적으로 드러날지 주목된다. 흑백 이미지가 눈길을 끄는 <로즈>는 미하엘 하네케 감독과 작품을 함께 만든 오스트리아의 마르쿠스 슐라인처 감독의 작품으로, 남장 여자로 살아가는 인물의 비극적 삶을 그린다. 전작 <마이클>에서 보여주었듯 평범한 일상에 도사린 서늘한 폭력과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연과 혼란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그의 연출이 묵직한 톤으로 전개되는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될지 주목된다.

올해 월드 시네마 섹션에서 특히 눈여겨볼 이름은 랜스 해머 감독이다. 2008년 <밸러스트>로 미국 독립영화계에 신성처럼 등장해 그해 최고의 데뷔작으로 평가 받은 후, 그는 18년간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배우 줄리엣 비노쉬를 주연으로 한 두 번째 장편 <엄마의 바다>를 세상에 선보였다. 이 영화는 중증 치매를 앓는 노년 여성을 두고 갈등을 빚는 남편과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교한 프레이밍으로 요동치는 관계를 포착한 랜스 해머 감독의 복귀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엄마의 바다>

유럽 사회파 리얼리즘의 정수를 확인하고 싶다면 스테판 브리제 감독의 <모범 직원 카를라>가 훌륭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사회적 시스템에 순응하며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아온 주인공이 예기치 않은 조직의 부조리와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히며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좇는 영화로, 자본주의의 비정한 맨얼굴 앞에서 마모되어가는 노동계급의 위기를 해부하며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전작 <더 골드만 케이스>에서 치밀한 법정 심리극을 선보인 세드리크 칸 감독이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들이 수감된 정신병동을 다룬 <15/18>, 땅을 두고 발생한 부족 간 갈등에서 비롯된 증오와 긴장을 집요하게 파고든 에민 알페르 감독의 신작 <구원은 없다> 역시 현실과 공동체에 뿌리내린 적대와 폭력을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칠레 영화 특유의 생동감과 시적인 공기를 만끽할 수 있는 도밍가 소토마요르 감독의 <라 페라>도 올해의 중요한 발견이다. <라 페라>는 ‘암캐’를 뜻하는 표현으로, 바람이 거센 외딴섬을 배경으로 해초를 채집하며 살아가던 실비아가 길 잃은 개 유리를 입양한 후 겪는 일들을 담아낸 작품이다. 그의 삶은 기쁨과 사랑, 다정함으로 가득하지만, 어느 날 유리가 사라지면서 과거의 트라우마와 직면하게 된다. 전작 <죽기에는 어려>로 로카르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감독의 신작인 만큼 더욱 눈길을 끈다. 한편 전작 <코르사주>로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마리 크로이처 감독의 신작 <젠틀 몬스터> 역시 기다려지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아동 성범죄자라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우리 주변에 스며든 악이 안기는 섬뜩함과 굳건한 믿음이 붕괴되는 경험을 담아낸다. 우리에게 익숙한 제목이기도 한 조지아 오클리 감독의 <이성과 감성>은 데뷔작 <블루 진>으로 영국 영화계 기대주로 떠오른 그가 제인 오스틴의 고전을 지극히 현대적이고도 입체적인 정서와 감각으로 매만진 작품이다.

<에브리타임>

가족과 관계의 균열을 다룬 또 다른 수작도 포진해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 식사 자리를 지독한 애증과 웃음, 격렬한 갈등의 전장으로 만든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상실의 고통과 모호한 시간성을 몽환적으로 그려낸 산드라 볼너 감독의 <에브리타임>, 우크라이나의 젊은 퀴어 커플이 겪는 사랑과 전쟁의 상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담은 이자벨 슈테버 감독의 <올랴와 올레흐: 난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않지>까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을 비춘다.

아프리카 영화의 약진과 신인 감독들의 거침없는 시선 역시 돋보인다. 아리 에시리, 추코 에시리 감독 형제가 나이지리아 항구도시 라고스를 배경으로 과감하게 각색한 <그날 밤, 클라리사에게>, 르완다의 역사적 상처와 여성의 연대를 담아내며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마리클레망틴 두사베잠보 감독의 <베니마나> 는 비아시아권 영화의 다채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미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기수로 떠오른 엘러건스 브래턴 감독의 강렬한 범죄극 <바이 애니 민즈: 자비는 없다>와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로 활동하던 조던 퍼스트먼 감독의 클럽 문화와 변화하는 관계를 그린 장편 데뷔작 <클럽 키드>도 함께 소개된다.

<이성과 감성>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도 이어진다. 수많은 뮤지션의 초상을 남겨온 그랜트 지 감독의 첫 극영화 <내가 사랑한 빌 에반스>,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애니메이션의 독창적 감각으로 각색한 세바스티앵 라우덴바흐 감독의 <비바 카르멘>, 동명의 장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응우옌푸엉마이 감독의 <우리, 파도처럼>, 그리고 부산이 처음 발굴해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하는 에르네스토 마리아 첸소리 감독의 <딥 블루>까지. 올해 월드 시네마 섹션은 익숙한 이름과 새로운 얼굴이 함께 만들어가는 동시대 세계 영화의 새로운 흐름과 감각을 만나는 풍성한 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