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한층 넓어진 지평 위에서 서른한 번째 축제의 서막을 연다.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신작과 비범한 신예들의 수작부터 영화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고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까지, 올해 부산을 채울 다채로운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열흘간 이어질 영화의 향연 속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저마다의 한 장면을 품어가길.

세대를 잇는 움직임

WRITER 이윤영(시네마토그래프 대표)

<왕과 새>

시대가 다시 애니메이션에 열광하고 있다. 전 세계를 뒤흔들며 하나의 현상이 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애니메이션영화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놀라운 흥행 성적을 내고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하는 대형 특별기획 프로그램 <일본 애니메이션 특별전: 광기의 걸작, 전율의 기대작 12+1>을 야심 차게 선보인다.

<시라누이>

부산에서 먼저 일본 애니메이션이란 광활한 하늘에 빛나는 걸작과 만난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1985년 작품 <천사의 알>은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와 협업해 완성한, 몽환적 아름다움이 침잠해 있는 작품이다. 알을 품고 다니는 소녀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이 서사를 상징적 이미지로 만들어내 난해하다는 평가와 컬트적 추앙을 동시에 받았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 었던 <메모리즈>는 30년 만에 다시 부산을 찾는다. 사이버펑크의 거장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 감독이 제작 지휘한 3편의 SF 옴니버스로 개봉 당시 전 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오토모 가쓰히로가 각본을 쓴 <메트로폴리스>는 <은하철도 999>의 린타로 감독이 5년의 제작 기간과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최고 수준의 제작비로 완성한 대작이다. 부유한 삶과 빈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한 데즈카 오사무의 동명 만화를 영화로 옮겼다. 2004년에 공개된 2편의 영화도 흥미롭다. <마인드 게임>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의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컬트적 인기를 끌었던 모리타 슈헤이 감독의 단편 <숨바꼭질>도 장르의 고유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

각양각색의 독보적 세계를 구축한 거장들의 유산이 키워낸 동시대 신예들의 신작도 함께 소개된다.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는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불꽃 공방에서 전설의 불꽃 ‘슈하리’를 좇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화가로 활동해온 시노미야 요시토시 감독은 신카이 마 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에 미술과 특수 장면 연출로 참여한 바 있으며, <시라누이>의 가타노사카 료 감독 역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제작한 코믹스 웨이브 필름의 지원을 받으며 인연을 맺었다. 제목의 ‘시라누이’는 일본 규슈 야쓰시로해의 여름밤 수평선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불빛을 일컫는다. 칸영화제와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가도와키 고헤이 감독의 <우리는 외계인>은 어른이 된 후에도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담았다. <고스트-밤의 끝>은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진 근미래를 배경으로 삶의 의미를 묻는 작품이다. 다수의 TV 시리즈와 극장판 애니메이션 연출로 알려진 나쓰메 신고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이번 특별기획에서는 재패니메이션이라는 방대한 세계의 원류가 되어준 중요한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저주받은 걸작’으로 통하는 야마모토 에이치 감독의 <슬픔의 벨라돈나>는 하나의 범주로 묶기 어려운 일본 애니메이션 안에서도 이채로운 장면을 선사한다.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야심과 애정을 담아 만든 <불새 2772 사랑의 코스모존>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에 걸쳐 연재한 만화 <불새>를 원작으로 하는 역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두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고전 2편도 함께 선보인다. 야부시타 다이지 감독의 <백사전>은 동양의 디즈니를 꿈꾸며 탄생한 일본 최초의 장편 컬 러 애니메이션이다.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 폴 그리 모 감독 작품 <왕과 새>는 첫 장편 <루팡 3세: 칼리오 스트로의 성>에서부터 이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지브리의 공동 설립자 다카하타 이사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봉준호 감독 또한 역대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한 편으로 꼽아 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