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노 피렐리 행거비코카에서 루치아노 파브로의 사후 첫 미술관 회고전인 공간에 거주하기 전시가 개최됩니다.
- 펜디 2027 S/S 쇼는 파브로의 거울 큐브에서 영감을 얻은 거울 구조물로 몸의 자유와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 이번 전시는 관객이 작품 안으로 들어가고 통로를 걸으며 공간과 인지 방식의 변화를 경험하도록 기획되었습니다.
밀라노 피렐리 행거비코카(Pirelli HangarBicocca)에서 열리는 〈아비타레 로 스파치오. 공간에 거주하기(Abitare lo spazio. Inhabiting Space)〉는 2007년 루치아노 파브로(Luciano Fabro)가 세상을 떠난 후 열린 첫 미술관 회고전입니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초기 실험작부터 2000년대 조각과 설치 작품까지 약 50점을 선보입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작품 안으로 들어가고, 벽 사이를 걸으며 루치아노 파브로가 생전 탐구한 작품과 사람, 공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죠. 전시는 2027년2월 21일까지 이어집니다.
펜디 런웨이에서 다시 만난 루치아노 파브로
펜디 2027 S/S 쇼장에서 거울에 비친 다른 관객과 자꾸 눈이 마주쳤습니다. 괜히 민망해 시선을 돌려도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죠. 쇼장 한가운데 들어선 거대한 거울 구조물 때문이었는데요. 이탈리아 작가 루치아노 파브로의 〈거울 큐브(Cubo di specchi)〉에서 영감받은 거울은 런웨이를 걷는 모델과 객석의 관객을 함께 비추며, 쇼를 보는 사람까지 하나의 쇼로 만들었죠.
펜디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이번 시즌 몸의 자유와 타인과의 관계에 주목했습니다. 언더웨어를 겉으로 드러내고 남성복과 여성복의 요소를 섞으며,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몸을 표현하고 옷을 입는 자유를 제안했죠. 거울을 활용한 쇼장 역시 컬렉션의 주제를 이어갔습니다. 모델을 따라가던 관객의 시선이 거울에 비친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로 옮겨갔으니까요. 서로 다른 몸의 자유와 관계를 다룬 컬렉션의 이야기는 그렇게 객석까지 이어졌습니다.

루치아노 파브로 원작에서도 관객은 서로를 바라봅니다. 이번 회고전에 소개된 〈알레스티멘토 테아트랄레(Allestimento teatrale)〉는 안팎을 거울로 덮은 큐브와 바깥에 놓인 의자로 구성됐는데요. 안에 들어간 사람은 거듭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밖에 앉은 관객은 거울에 비친 자신과 다른 관객을 마주하죠.
1975년 첫 공개 당시, 배우는 큐브 안에서 글을 낭독했습니다. 객석에는 배우 목소리만 들렸고, 눈앞 거울에는 자신과 다른 관객의 모습이 비쳤죠. 배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대신 관객들의 시선을 장면으로 채운 것입니다. 파브로는 배우와 관객의 역할을 뒤집어, 관객이 공연을 지켜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면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도록 의도했습니다.
익숙한 시선을 흔드는 조각들

1936년 토리노에서 태어난 파브로는 1959년 밀라노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접한 화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와 행위예술가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의 작업은 그의 예술에 중요한 바탕이 됐는데요. 폰타나는 빛과 구조물을 활용해 관객이 직접 들어가 경험하는 공간을 만들었고, 만초니는 자신의 숨을 불어넣은 풍선을 작품으로 제시하며 무엇이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영향을 받은 파브로는 작품 형태뿐 아니라 그것이 놓인 공간, 관객이 보고 느끼는 방식까지 함께 탐구했죠. 이후 일상적인 재료와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한 흐름에 함께하면서, 고전 조각과 미술사의 전통을 적극 활용해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1968년 시작한 〈이탈리아(Italie)〉 연작에서는 재료와 배치에 따라 익숙한 형태가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살폈습니다. 이탈리아반도의 장화 모양 윤곽을 납과 유리, 종이와 철 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했는데요. 같은 지도도 재료와 크기, 놓인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몸으로 경험하는 공간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1966년 작품 〈인 쿠보(In cubo)〉는 흰 천을 씌운 가벼운 구조물입니다. 관객이 이를 들어 올려 안으로 들어가면, 눈앞에 있던 상자 모양의 조각이 자신을 둘러싼 작은 방이 되는데요. 파브로는 자신의 키와 양팔을 벌린 길이에 맞춰 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크기가 다른 다섯 가지 전시용 버전이 마련돼, 관객은 옷을 입어보듯 안에 들어가 자신에게 편안한 높이와 너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몸을 얼마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지, 벽이 얼마나 가까이 느껴지는지를 통해 각자에게 편안한 공간의 크기를 가늠해 보도록 설계했습니다.


전시의 중심에는 1981년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회고전을 위해 만든 〈하비타트(Habitat)〉를 재구성한 공간이 있습니다. 파브로는 종이를 입힌 벽으로 통로를 나누고 그 사이에 작품을 배치해, 관객이 여러 방향으로 걸으며 감상하도록 했는데요.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이 스스로 길을 고르고 작품을 만나도록 한 파브로의 구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원래 공간의 비례와 배치를 되살렸습니다. 관객은 벽 사이로 난 길을 고르고 모퉁이를 돌며 작품을 만나고, 가까이에서 세부를 살피다가 다른 통로에서는 여러 작품을 함께 바라보기도 하죠. 파브로가 배치한 벽과 통로는 관객이 무엇을 먼저 보고 어디에서 멈출지에도 영향을 줍니다.
작품과 사람이 함께 머무는 자리

〈하비타트(Habitat)〉에는 작품과 사람이 함께 머무는 환경을 만들려는 파브로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작품을 어디에 놓을지뿐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다가가고, 어디에 서서 바라볼지까지 고민한 것이죠. 벽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작품이 모퉁이를 돌자 나타나고, 멀리서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던 조각이 가까이에서는 다른 모습을 드러냅니다. 관객의 걸음에 따라 눈앞의 장면도 달라지고요.


펜디 쇼에서는 거울에 비친 다른 관객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면, 이번 회고전에서는 작품 앞에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의식하게 됩니다.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형태가 다르게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면 빛과 소리도 다르게 느껴지죠. 〈공간에 거주하기(Inhabiting Space)〉에서 파브로의 작품을 따라 걷다 보면, 전시장을 나선 뒤의 풍경도 조금 다르게 보일지 모릅니다. 늘 지나던 공간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한 번 더 살피게 될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