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트 터틀넥 슬리브리스 톱 프라다(Pr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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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 촬영을 마치고 이제훈과 마주 앉아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의 45분쯤은 영화 <박열>에 대해, 나머지 10분은 연기와 영화 그리고 마지막 5분은 그의 사적인 일상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박열>의 개봉을 목전에 둔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질문에 혹여 빠뜨린 내용은 없는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가며 말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최적의 단어를 찾아가며 문장을 재차 고치고 다듬어 대답을 내놓았다. 이번에 연기 한 작품은 어떤 영화냐는 짧은 질문에는 새 작품에 관해서라면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는 듯 명확한 호흡으로 답했다. 주요 인물들의 삶과 심리부터 스토리 전개, 영화에 담긴 메시지와 배경이 된 시대의 역사적 사실까지. 그가 내어놓은 답변은 모두 매우 또렷하고 자세했다.

배우 이제훈이 드라마 <시그널> <내일 그대와>, 영화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등 여러 작품을 끝마친 직후 만난 영화 <박열>. 실존 인물인 주인공 ‘박열’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다. 가진 건 오로지 신념뿐인 스물두 살의 청년이 핍박과 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굳은 의지를 드러낸다. 스토리가 전개되는 내내 거대하고 무자비한 세력을 상대로 달려들길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제훈은 이토록 뜨겁고 단단한 청춘 박열을 연기했다. 배우의 길에 들어선 이래 가장 새로운 인물로 살았다는 그는 이제 막 작품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보통의 삶으로 돌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오버사이즈 재킷, 쇼츠 모두 페르드르 알렌느(Perdre Haleine), 브이넥 니트 톱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슈즈 피에르 아르디(Pierre 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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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와 팬츠 모두 질샌더(Jil S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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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 터틀넥 슬리브리스 톱 프라다(Prada), 화이트 셔츠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팬츠, 스트랩 샌들 모두 프라다(Pr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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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컬 패턴 베스트 구찌(Gucci), 블루 그러데이션 셔츠, 데님 쇼츠 모두 질샌더(Jil S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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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포스터부터 범상치 않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제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어제 처음 <박열>의 완성본을 봤다. 내가 봐도 새로운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몇 년 전부터 말끔한 모습의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터라 이미지를 한번 뒤집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차였는데, 이준익 감독님이 때마침 반가운 제안을 해 맡은 역할이다.

배우로서 새로운 시도를 한 영화이니 촬영할 때 마음가짐이 다른 때와 많이 달랐을 것 같다. <박열>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 읽었을 때는 그저 놀랍기만 했었다. 이렇게 엄청난 삶을 산 인물을 모르고 살았다니. 박열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독립운동을 하다 아나키스트가 되고, 당시 조선 사람으로선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는 동경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펼친 대단한 위인이다. 박열의 삶을 자세히 알게 된 후에는 부담감이 점점 더 커졌다. 영화적 재미 이상의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열이라는 인물의 숭고한 삶을 더 묵직하고 진중하게 담아내려면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나의 섣부른 해석으로 행여 이야기가 왜곡되어 전달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찍는 동안에는 어는 때보다도 나 자신을 혹독하게 밀어붙였던 것 같다.

부담스러운 만큼 공부도 많이 했겠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녹여내야 했기 때문에 우선 다양한 자료를 많이 찾아 읽었다. 그중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특히 여러 번 봤다.

 

체크 재킷과 셔츠 모두 프라다(Prada), 베이지 쇼츠 노앙(Noh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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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비 수트, 셔츠, 슈즈 모두 구찌(G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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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시대 배경이 일제강점기인데다 주인공은 실존했던 독립운동가다. 관객의 시각이 한층 날카롭고 예민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당시의 이야기는 늘 민감한 소재니까. 그래서 모든 장면에 더 조심스럽게 임했다. 상상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감정을 마구 내보이는 식이 아니라, 대본에 나오는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와 대사 한 줄 한 줄을 촘촘하게 설계해 연기해야 했다. 단순하게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한 식상한 표현들은 배제하려 노력했고, 모든 테이크에 담긴 의미를 재차 곱씹어 생각하는 데 공들였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영화들을 보면 대개 일본 세력에 맞서 싸우는 액션이 주를 이룬다. <박열>은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당시의 인물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에 부딪혔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해방의 역사를 새롭게 풀어낸 뜻깊은 영화다.

촬영 현장에서 육체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박열의 실제 외모와 싱크로율을 높이기 위해 매번 몇 시간에 걸친 정교한 분장 과정을 거쳤다. 나뿐 아니라 스태프들도 많이 힘들었을 거다. 애써 한 분장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촬영 기간에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극 중 박열이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는데 그러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기도 했고. 여러 이유로 내내 굶었다. 영화 촬영장에 오는 밥차의 식단이 맛있기로 유명한데, 밥때마다 멀찍이 떨어져 앉아 단백질 셰이크만 마셨다. 지금 생각해도 괴로운 순간이었다.

박열처럼 지켜내고 싶은 신념이 있나?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 단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게 내 인생의 첫째다. 여유가 좀 생기면 일상적인 즐거움도 찾고 싶은데 아직은 그 방법을 잘 모른다. 다만 현재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연기를 아주 잘하고 싶고, 또 좋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거다.

좋은 작품, 좋은 연기란 무얼까? 어릴 때부터 영화를 아주 많이 봤다. 그때부터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행복해지는 걸 느끼곤 했었다. 그렇게 좋은 기억을 남긴 영화는 몇 년이 지나 다시 봐도 처음 보고 느낀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영화가 좋은 영화 아닐까 싶다. 그런 작품을 위해 진심을 다해 연기하는 것이 곧 좋은 연기일 테고.

영화 속 박열은 스물두 살이다. 이제훈의 20대 초반은 어땠나? 눈빛이 반짝반짝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호기심도 많았고, 본격적으로 연기자를 꿈꾸기 시작한 때였거든. 한편으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던 때이기도 하다.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안정적인 길을 택하는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배우의 길에 이렇게 나를 내던져도 될까 하는 생각에 혼란을 느꼈었다. 조금 겪고 나서 보니 연기자라는 직업은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이어나갈 수 있는 일이고, 또 그 선택이 타당했다는 걸 매번 증명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배우의 길에 들어선 걸 후회한 적도 있을 것 같다.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다. 다만 일을 하면서 한창 바쁠 때는 괜찮은데, 작품 사이에 시간이 나면 어딘가 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채워나가는 방법을 열심히 찾는 중이다. 좁은 생각에 갇히지 않게 세상을 좀 더 넓게 둘러보며 지내면 마음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 공허함은 쉬지 않고 가열차게 달려왔기 때문에 드는 걸지도 모른다. 드라마 <시그널>부터 <내일 그대와>에 이어 <박열>, 지금 촬영 중인 영화 <아이 캔 스피크>까지.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일했다. 특별히 그러려고 계획한 건 아니었다. 이 작품만 끝나면 쉴 수 있겠구나 싶다가도 곧바로 또 마음이 가는 작품을 만나는 일이 반복됐다. 한 작품을 마치면 캐릭터의 여운에 좀 오래 휩싸이는 편인데, 그렇다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편도 아니다.

 

화이트 니트 카디건 일레븐티(Eleventy), 화이트 니트 피케 셔츠 맨온더분(Man on the B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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