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김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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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VUITTON

루이 비통은 새로운 컬렉션을 공개할 장소로 대대적인 리뉴얼을 마치고 오픈을 앞둔 LVMH 그룹 소유의 백화점, 라 사마리텐을 선택했다.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공개한 고풍스러운 공간의 각 층에는 그린 스크린을 설치해 뭔가 심상치 않은 순간을 목격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쇼는 백화점 꼭대기 층에서 진행했지만, 영상으로 쇼를 감상하는 이들은 스크린에 투영된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컬렉션과 오버랩할 수 있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이번 시즌 젠더 플루이드에 집중했다. 두 성별의 조화, 가변성처럼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에 몰두한 것. 오프닝에 등장한 마치 소년 같은 외모의 신인 모델 에밀리 밀러의 모습만 봐도 그의 철학을 간파할 수 있다. 여자와 남자, 누가 입어도 어색한 느낌 없이 잘 어울릴 아이템이 루이 비통 컬렉션을 가득 채웠으니 말이다. 제스키에르는 교묘하게 스포티즘을 느낄 수 있는 클래식한 아우터, 미니드레스를 장식한 파격적인 그래피티 패턴처럼 성별뿐 아니라 시대와 무드를 넘나들며 루이 비통만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다.

LEMAIRE

르메르는 이번 시즌, 맨즈 컬렉션 기간에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통합해 발표하기로 했다. 그 때문일까? 디지털 런웨이 방식으로 공개한 컬렉션은 커플 룩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었다. 실제로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일정을 소화하는 건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였으며, 남성과 여성 팀이 소재나 컬러를 함께 고르는 등 손발을 맞춰가며 작업했다고 전했다. 게다가 남성에게 관능을, 여성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한, 성별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전복한 룩을 교묘하게 섞었다. 컬러에 일가견이 있는 브랜드답게 색의 온도를 미묘하게 조절해 세련된 얼스 컬러 팔레트를 완성했으며 멕시코 예술가 마르틴 라미레스의 풍경화를 프린트로 활용해 리듬감을 더했다. 르메르 특유의 흐르는 듯한 실루엣과 매 시즌 일관성 있게 제안하는 견고한 가죽 액세서리까지, 브랜드의 시그니처를 어떻게 활용해야 지겹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 매번 사랑받을 수 있는지 간파한 게 분명했다.

KENZO

펠리페 올리베이라 밥티스타가 주도하는 두 번째 겐조 쇼의 막이 올랐고, 게스트들은 철저한 방역을 거쳐 장미 정원으로 입장했다. 베일로 덮은 모자. 이 상징적인 아이템을 보며 디자이너가 무엇에 몰입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시골 양봉가를 담은 다큐멘터리 <허니랜드(Honeyland)>를 본 후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을 떠올린 그는 지금이라도 우리가 놓친 자연과의 조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몸을 감싸는 모자의 베일, 주머니를 빼곡하게 단 유틸리티 팬츠와 베스트, 방역관이 떠오르는 레인코트 등 디자인은 세기말의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원색과 화려한 플라워 프린트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꾸게 했다. 나아가 오직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만을 사용하고, 세계 호랑이 개체 수를 두 배로 늘리기 위해 세계자연보호기금(WWF)과 협력하는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며 진지하게 환경보호 사상을 주입했다. 처음보다 나은 두 번째 작품을 보여줬으니, 다음 시즌은 더욱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JASON WU

당연하게 누리던 일이 불가능해진 지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모두의 바람을 담아 쇼를 준비한 제이슨 우. 야자수를 비롯한 열대식물로 꽉 채운 브루클린의 비스콘티 가든 센터 옥상은 마치 도심 속 신기루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런 세트를 만든 건 제이슨 우가 제2의 고향이라고 언급한 멕시코 툴룸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컬렉션 역시 오프닝에 LGBTQ+ 활동가 인디아 무어가 입고 등장한 햇볕에 그을린 듯한 오렌지색 드레스처럼 온통 이국적이고 편안한 룩 일색이었다. 그는 이전과 달리 간결하고 입기 편한 옷에 집중했다. 컬러와 프린트만으로 포인트를 준 낙낙한 드레스, 사파리풍 버뮤다 쇼츠와 챙 넓은 모자, 에스닉한 끈을 엮은 샌들까지, 모든 게 경쾌했으며 무엇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컬렉션의 수익금을 성 소수자와 소외된 지역사회를 위해 사용한다니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 아닐까?

JACQUEMUS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는 얄미울 정도로 영민하다.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아주 잘 알고 있고, 항상 그 능력을 한껏 활용한다. 지난 7월 일찌감치 공개한 그의 2021 S/S 컬렉션 역시 보는 순간 ‘과연?’ 하는 의혹을 무장해제 시켰다. 1백 명의 게스트를 파리 외곽 벡생 자연공원으로 초대해 금빛으로 일렁이는 밀밭 사이로 600m에 이르는 좁고 구불구불한 런웨이를 공개한 것. 코로나19가 터지고 지난 3월의 파리 패션위크 이후 처음으로 열린 쇼치고는 그나마 논란의 여지가 적어 보였다. 무엇보다 밀밭 사이로 걸어 나오는 모델들은 하나같이 남프랑스의 여유와 자연스러움이 녹진하게 밴 옷을 입고 등장해 배경과 완벽한 하모니를 이뤘다. 곳곳에 가느다란 스트랩으로 긴장감을 더하고, 맑은 햇볕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바스락거리는 소재로 완성한 드레스가 메인 아이템이었다. 컬렉션의 주제는 ‘사랑(L’Amour)’.자크뮈스가 창조한 천국에서 마주한 사랑은 더하거나 뺄 것 없이 완벽했다.

HERMÈS

고대 유물이나 예술가의 작품을 프린트한 거대한 기둥을 세워 테니스 클럽 드 파리를 모던한 신전으로 꾸민 에르메스. 오프닝에서 새로운 컬렉션 전체를 한꺼번에 공개해 쇼의 흐름을 참신하게 이어갔고, 지극히 에르메스다운 컬렉션에는 팬데믹 시대에 대한 고찰과 인식이 담겨 있었다. 직접 만지는 행위에 대한 환상과 그것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그 때문인지 미니멀하고 클래식한 옷에 가죽이나 실크처럼 브랜드를 대표하는 소재를 풍부하게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게다가 50%는 오리지널 컬렉션에서 차용한 뒤 새로운 디자인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해 ‘영원한 스타일’이라는 가치를 더욱 확고하게 부여했다고 전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빼앗긴 손길과 촉각, 그리고 팬데믹 시대에 패션계에서 상기해야 하는 책임감에 대한 생각을 아주 세련되게 풀어내며 나데주 바니 시불스키가 이끄는 에르메스는 진정한 럭셔리의 표상을 제시했다.

ISABEL MARANT

이자벨 마랑은 코로나19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걸까? 세계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싶었던 디자이너는 프랑스 현대무용 팀 오드((La) Horde)와 함께 무대를 꾸몄고, 팔레 드 도쿄 앞 광장에는 1980년대 영화 <더티 댄싱>이 연상되는 흥겹고 강렬한 쇼가 펼쳐졌다. 희망적인 이미지를 담고자 한 디자이너의 의지는 브랜드 특유의 과장된 1980년대 실루엣, 비비드 컬러, 반짝이는 소재, 플라워 패턴 등이 뒤섞인 디스코풍으로 귀결됐다. “오드의 작품을 사랑한다. 매우 현대적이고 때로는 당황스럽다.” 디자이너의 설명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댄스 팀의 안무 덕분에 보는 내내 아드레날린이 거침없이 분출되는 밝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댄서들 역시 핑크에서 레드, 블루로 이어지는 쇼의 컬러 팔레트에 맞춰 옷을 갈아입어 더욱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줬다. 다만 평소라면 축제였을 이 쇼를 팬데믹 시기임에도 공개적으로 진행해 논란을 낳은 점이 아쉬웠을 뿐.

GIAMBATTISTA VALLI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트렌드와 관계없이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굳건히 지켜내는 디자이너지만, 이번 시즌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처럼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는 소재와 러플 등 로맨틱한 디테일, 부드러운 컬러와 리본 액세서리를 적극 활용하되 사랑스러운 분위기와 대비되는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 버킷 햇이나 미래적인 디자인의 선글라스로 힙한 무드를 가미한 것. 물론 매 시즌 큰 변화를 추구하는 다른 브랜드에 비하면 이 정도 변화는 극도로 소극적이다. 그러나 브랜드가 고상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세계 곳곳의 부유한 여성을 타깃으로 삼는 점을 상기하면 일률적인 디자인에 소소한 자극을 주고 싶어 한 디자이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리본 장식 외에 어떠한 요소도 더하지 않은 블랙 콜드 숄더 드레스는 지금껏 보지 못한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모던하고 미니멀한 면모를 담고 있으며, 좀 더 동시대적인 모습을 보여줄 다음 컬렉션에 궁금증을 품게 만들었다.

GIORGIO ARMANI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브랜드의 DNA를 고수하는 거장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배우 피에르프란체스코 파비노가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상과 함께 디지털 쇼를 공개한 디자이너는 코로나19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패션 철학을 충실하게 구현했다. ‘시대를 초월한 생각(Timeless Thoughts)’을 비전으로 내세운 컬렉션엔 지극히 아르마니다운 아흔아홉 가지 룩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정확히 발목 위에서 커팅한 팬츠와 마이크로 체크 블레이저의 앙상블을 시작으로 지오메트릭 패턴 드레스, 그래픽적으로 변형한 플로럴 프린트 오간자 원피스까지 하나같이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오랜 팬이라면 두 팔 들고 환영할 옷임은 분명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과거에 본 듯 익숙한 것이 문제. 하우스 고유의 색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시대 흐름에 발맞춰 이유 있는(!) 변화를 주는 유연한 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VICTORIA BECKHAM

빅토리아 베컴은 계획 중이던 살롱 쇼를 취소하고 ‘베컴 패밀리’로 불리는 자신의 가족을 초대해 특별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쇼장 규모도, 의상 개수도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세련된 색감 조합과 우아한 디자인만큼은 여전했다. 특히 빅토리아가 유행을 선도하던 시절 종종 입던 스타일의 부츠 컷 팬츠가 주요 아이템으로 등장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었다. 이 중에서도 애시드 그린 컬러 팬츠는 캐주얼한 재킷, 실키한 셔츠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직까지도 정통성을 중시하는 패션계의 일부 디자이너에게 그는 명성을 이용하는 일에만 능한 사업가로 여겨지지만, 그에게는 여‘ 성들이 입고 싶어 하는 옷’을 알아채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때로는 오직 런웨이만을 위한 옷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번 컬렉션은 ‘입을 수 있는 것들’로만 구성했어요.” 그의 말처럼 감각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컬렉션이었다.

Y/PROJECT

지금 패션계에서 활약하는 젊은 디자이너 중 가장 전도유망한 인물을 꼽으라면 대다수가 글렌 마르탱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전위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힙하지만 정교한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하는 그의 컬렉션은 실망을 안기는 법이 없다. 이번 시즌 그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옷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인지 컬렉션은 해체주의적 요소는 덜되, 사랑스러운 색감과 부드러운 소재를 더한 모습이었다. 가장 특별한 부분은 옷 곳곳에 마치 숨바꼭질하듯 변형 가능한 요소를 숨겨놓은 점이다. 단추를 이용해 자유롭게 분리하거나 이을 수 있는 드레스, 일반적인 형태에서 입체적인 형태로 바뀌는 데님 팬츠가 대표적인 예다. 게다가 하우투 영상을 촬영해 입는 방법을 알려주는 친절까지 갖췄으니, 그야말로 보는 재미가 가득한 컬렉션이었다.

ZADIG & VOLTAIRE

페이크 퍼나 가죽 같은 강렬한 소재, 화려한 애니멀 패턴, 웨스턴 부츠에 이르기까지 브랜드를 상징하는 요소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일까? 쟈딕 앤 볼테르의 새 컬렉션에서는 고유의 미국 서부 개척 시대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바지에 컷아웃으로 변화를 주거나 스웨터에 실밥을 잘못 잡아당긴 듯한 디테일로 위트를 가미하며 독창적인 시도를 더하려고 했지만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물론 기존과 같은 과한 장식과 패턴을 배제하고 일반적인 색과 형태로 디자인한 옷들은 보기에도, 입기에도 부담 없다는 분명한 장점을 갖췄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 런웨이 컬렉션을 진행하며 나름대로 확고한 디자인 세계를 보여온 브랜드의 쇼라기에는 지극히 평범했다. 지금껏 쌓아온 탄탄한 마니아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아쉬움의 말을 남기게 만드는 컬렉션이었다.

TORY BURCH

토리 버치는 새 시즌 룩북을 매사추세츠의 핸콕 셰이커 빌리지에서 촬영했다. 그가 ‘아름다움은 효용성에서 비롯된다’는 셰이커교(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티즘의 한 종파)의 오랜 격언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떼어낼 수 있는 칼라 장식과 밑단을 묶는 통 넓은 바지, 드레스에 가까울 정도로 품이 낙낙한 셔츠까지, 움직임에 제한을 두지 않으며 활용하기 좋은 아이템으로 구성한 컬렉션은 이 격언을 형상화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기존에 비해 디자인은 훨씬 모던해졌지만, 이국적인 패턴과 태슬 장식을 이용해 브랜드 고유의 색을 지켜낸 점도 인상적이다. 실용성에 기반을 둔 브랜드는 화려한 컬렉션의 세계에서 겉도는 경우가 많다. 토리 버치 역시 이런 브랜드에 속한다. 그러나 이번 시즌 토리 버치가 보여준 편안하고 여유로운 옷들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하이패션보다 훨씬 마음에 와닿았다.

TOM FORD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패션계 전체가 1년 이상 길고 긴 동면에 들어갈 것을 직감했습니다.” 대다수 하우스 브랜드가 공장과 아틀리에, 사무실까지 전면 폐쇄한 상황에서 톰 포드는 좌절하는 대신 자신의 전성기를 돌아보고, 젊음의 기록을 재해석하는 컬렉션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밝고 긍정적인 색감과 자유로운 모델들의 포즈, 젊음이 느껴지는 강렬한 프린트와 실키한 소재는 패션계에 전설로 남은 톰 포드의 구찌 컬렉션을 떠올리게 만들며 그 의도를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톰 포드 하면 떠오르는 섹시하고 글래머러스한 분위기와 직선적이며 고급스러운 실루엣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컬렉션은 다시 행복이 찾아올 순간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멋진 것보다 우리를 웃게 하는 옷이 필요하니까요”라는 그의 말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TOD’S

친근한 이미지 뒤에 예민한 디자인 감각을 숨겨둔 브랜드들은 컬렉션 시즌이 되면 감춰왔던 존재감을 발휘한다. 토즈 역시 마찬가지로, 이번 시즌 그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따스하고 여유로운 색감과 자유로운 실루엣, 견고한 가죽 소재 신발이 더없이 우아한 조화를 이뤄낸 것. “여러 장인들과 함께 하는 작업 자체가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며, 숙련된 기술이 컬렉션에 드러나기를 바랐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발테르 키아포니의 말처럼 정교한 기술력이 없다면 구현 불가능한 수준의 구조적인 형태가 눈길을 끌었다. 디자이너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브랜드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새로운 분위기를 더하는 건 분명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키아포니는 두 번째 토즈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밀라노의 주요 디자이너로 떠오르고 있는 자신의 가치를 당당하게 증명해냈다.

TIBI

티비의 새 컬렉션은 1929년에 전 세계를 덮친 대공황에서 출발했다. 세계적으로 혼란하지만 개개인의 옷차림은 너무 어둡거나 무겁지 않았던 당시 상황이 코로나19로 인한 패닉 상태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이미 스밀로빅은 새 시즌 룩들을 차분하지만 우울감은 느껴지지 않는 색감과 패턴으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매번 직선적인 수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티비지만, 이번만큼은 모던한 슬립 드레스나 드로스트링 디테일로 입체적인 형태를 이룬 블랙 드레스, 잔잔한 프린트로 화사한 기운을 더한 플로럴 드레스 같은 드레스가 더욱 주목받았다. 럭셔리 하우스처럼 큰 규모를 자랑하며 화제를 모으지는 못하지만, 티비는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다. 코로나19 로 자본력이 부족한 개인 브랜드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는 이때, 소리 없이 강한 저력으로 나아가는 티비의 앞날을 응원한다.

THOM BROWNE

톰 브라운은 ‘달에서 개최된 2132 올림픽’이라는 기발한 컨셉트 아래 압도적인 규모의 쇼를 선보였다. 푸른 잔디가 깔린 드넓은 경기장을 쇼장으로 정하고, ‘지구를 기반으로 하는 디자이너 톰 브라운’이 만든 유니폼을 입은 선수 역할의 모델들을 대거 등장시키며 이목을 끈 것. 컬렉션은 동물 탈을 쓰거나 남성용 드레스로 충격을 주었던 지난 몇 시즌에 비해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패치워크나 아플리케 같은 기법을 사용한 덕분에 쿠튀르 피스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섬세했다. 또한 모자부터 재킷, 스커트, 신발에 이르기까지 선글라스를 제외한 모든 아이템에서 색을 배제해 형태와 소재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으며, 변함없이 치마에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며 성별의 경계를 허문 디자인을 선보였다. 세상을 규정하는 많은 규율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패션에 장난기 넘치게 담아내는 그의 독보적인 디자인 철학은 다른 때에 비해 덜 돋보였지만, 마치 영화처럼 유쾌하게 감상할 수 있는 쇼였다.

THE ROW

재정난으로 직원의 절반을 감축한 더 로우는 세련된 스타일의 새 컬렉션을 선보이며 도산 위기라는 소문을 일축했다. 이번 시즌 컬렉션은 뉴트럴한 색감과 낙낙한 실루엣이 주를 이루지만, 포플린처럼 바스락거리는 소재를 중점적으로 사용해 경쾌한 느낌을 더했다. 담백한 포즈로 이러한 장점을 강조한 룩북 이미지는 변함없이 멋스럽고 우아하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발라클라바나 장갑 같은 위트 있는 아이템으로 포인트를 주거나 독특한 패턴을 가미하며 패셔너블한 느낌을 잃지 않던 지난 시즌과 달리, 당장 유니클로에만 가도 있을 법한 평범한 옷들만으로 컬렉션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여성이 이런 옷으로 옷장을 채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유수의 하우스 브랜드와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훨씬 높게 책정된 더 로우 컬렉션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이토록 평범한 셔츠와 팬츠에 2백만원 넘는 돈을 기꺼이 지불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많을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STELLA McCARTNEY

스텔라 맥카트니는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논의를 차치하더라도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입고 싶어 할 만한 모던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에 능하며, 유행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켜내는 몇 안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룩북 형태로 공개한 새 컬렉션에는 이러한 맥카트니의 장점이 총망라됐다. 고급스럽게 직조한 니트 톱, 고전적이면서도 힙한 수트와 예술적인 프린트가 그려진 드레스, 드로스트링 디테일로 무게감을 살짝 덜어낸 포멀한 옷들은 당장이라도 위시리스트에 담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공개된 옷 중 일부는 창고에 잠들어 있던 재고를 재활용해 만들었으며, 백과 슈즈 역시 인조가죽으로 제작해 환경 운동가다운 면모도 어김없이 드러냈다. 누구나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지만,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묵묵히 실천하는 브랜드는 흔치 않다. 그래서 맥카트니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진정성 있게 구축한 친환경 패션의 세계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값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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