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ENT BEGINS
향의 시작점을 꼽을 수 있다면 단연 그라스가 아닐까. 어째서 이 작은 도시가 전 세계 향수 원료의 근간이 되고, 유수의 조향사를 배출할 수 있었는지 내내 궁금했다. 프랑스 남부, 알프스와 지중해 사이 작은 언덕에 자리한 도시.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고,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공기는 차가운 곳. 그 두 기류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온도 차와 습도 때문인지, 그라스의 땅은 향의 원료가 되는 꽃을 키워내는 황금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책과 자료로만 접하던 그라스를 직접 마주한 건 지난 9월의 일이다. 샤넬 하우스의 헤리티지 향수, N°5의 핵심 원료인 자스민을 수확하는 샤넬 농장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그라스에 도착한 순간, 공기를 가르며 스친 낯선 향기에 발걸음이 멈췄다. 분명 익숙하지만, 어쩐지 더 생생하고 날것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로 N°5의 중심에 자리한 자스민의 향이었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으로 이어지며 드넓게 펼쳐진 자스민 꽃밭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평온했다. 글자로만 접하던 그라스라는 이름이 눈앞의 현실이 된 순간. 샤넬이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이어오고 있는 뮬(Mul) 가문의 농장은 마치 각각의 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숨 쉬며 공생하는 작은 마을을 보는 듯했다. 죠세프 뮬과 함께 현재 농장을 지키고 있는 뮬 가문의 사람에게서 이곳의 자스민이 품은 숨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땅의 자스민은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 표현했다. 수확자들은 매일 새벽 손끝으로 꽃의 상태를 느끼고, 햇살의 각도와 바람의 방향으로 수확할 타이밍을 캐치한다. 그들에게 자스민은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마치 대화를 나누는 생명체처럼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존재다. 꽃과 사람, 자연과 시간의 호흡이 맞물려 있는 이 밭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면서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 조용한 리듬 속에서 느껴지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의 마음이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때 이 지역의 꽃밭은 개발의 물결 속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때 샤넬은 뮬 가문과 장기 계약을 맺으며 그라스의 향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십이 아니라, 자연과 전통, 그리고 향의 근원을 보존하기 위한 약속이었다. 그 결정 덕분에 N°5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자스민 향이 1백 년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이어지며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라스는 그런 곳이다. 비옥한 토양, 긴 해, 바람이 머무는 지형까지 자연이 스스로 향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곳. 이곳에서는 향이 인공의 산물이 아니라, 시간과 사람, 자연이 함께 써나가는 이야기처럼 존재한다. 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숨처럼 느껴지는 곳. 그래서 그라스에서 피어나는 샤넬 고유의 향은 지금도 과거의 유산이자 현재의 생명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건물 너머로 드넓게 펼쳐진 그라스의 꽃밭.
자스민을 수확하는 사람의 손길에서 섬세함이 느껴진다.

 

샤넬의 향수가 만들어지는 공장 내부의 모습.
농장에서 막 건너온 향기로운 자스민. 앱솔루트 한 방울에는 수천개 이상의 자스민이 쓰인다.
자스민이 농축된 형태의 앱솔루트.

THE ALCHEMY OF TRANSFORMATION
오전의 수확이 끝나면 자스민은 지체 없이 공장으로 옮겨진다. 시간이 향의 품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샤넬은 1988년, 농장 바로 옆에 공장을 세워 운반 시간을 줄였다. 자스민은 따는 순간부터 산화가 시작되는 터라 신선한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빠른 운송이 필수다. 공장 안에서는 곧바로 선별과 추출 과정이 이어진다. 이곳은 단순한 산업 공간이 아니다. 꽃밭의 연장선이자 향을 끌어내는 조용한 의식의 장소다. 바깥의 따뜻한 공기가 차분히 식어가는 실내에서 금속 상자에 담긴 자스민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용매제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자스민은 자신이 가진 가장 순수한 본질을 내어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용액은 점점 더 진해지고, 증발이 끝나면 남는 것은 꽃의 영혼이라 불릴 만큼 농축된 왁스 형태의 물질이다. 이 콘크리트는 다시 정제 과정을 거쳐 가장 순수한 향의 정수, 앱솔루트로 변한다. 앱솔루트 한 방울에는 자스민 수천 송이가 응축되어 있고, 이 한 방울이 모여 한 병의 N°5가 완성된다.

 

A JOURNEY FROM GRASSE TO PARIS
공장에서의 과정이 모두 끝나면 이제 N°5는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라스의 향이 파리에 다다르고, 다시 전 세계에 같은 숨결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향사와 기술자를 비롯한 수많은 조력자들은 끝없는 노력으로 이 과정을 지켜낸다 이들은 단순한 협업자가 아니다. 조향사, 화학자, 아트 디렉터, 농부, 수확자 등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누군가는 흙을 돌보고, 누군가는 향의 분자를 분석하며, 또 누군가는 그 향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한다. 이들의 손끝이 이어지며 맞닿을 때 비로소 하나의 향,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다. N°5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그건 한 세기를 건너며 진화해온 감각의 언어이자, 자연과 인간이 함께 써온 긴 서사의 결실이다. 향은 늘 같은 자리에 머물지만, 그 속에는 매일 새로 태어나는 생명과 같다. 샤넬 향수는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해마다 새롭게 경신되는 하나의 과정이자, 서로 다른 세대가 소통할 수 있도록 이어지는 대화다. 매년 그라스의 꽃밭에서 시작된 샤넬의 향은 오늘도 같은 리듬으로 세상을 새롭게 물들인다. 이번 트립은 그라스의 토양이 지닌 생명력과 파리의 정제된 감각이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질 때, 향은 단순한 향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가 살아 숨 쉬는 방식이 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N°5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샤넬 하우스의 장인 55인의 여정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