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 터틀넥 스웨터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와이드 터틀넥 스웨터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언제나 그렇듯, 정유미를 촬영하기로 한 날, 나는 예정 시간보다 30분 쯤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해 그녀를 기다렸다. 속속 도착하는 스태프들과 인사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정유미가 불쑥 등장했다. 동행하나 없이 반바지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터덜터덜 홀연히. 수년을 함께한 매니지먼트사를 나와 아직 새로운 회사를 결정하지 못한 터라 영화 <우리 선희> 홍보 스케줄은 이렇게 혼자 정리하고 다니는 중이란다.

배우 혼자 스튜디오에 등장한 게 생경하긴 했지만, 정유미에게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뭐랄까, 정유미란 배우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어느 쪽으로든 살짝 벗어나 있는 편이 어울린다. <가족의 탄생>에서 마음이 너무 착한 나머지 주변의 모든 남자에게 헤벌쭉 웃으며 호의를 베푸는 ‘헤픈’ 여자나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옆집 깡패를 좋아하게 되는, 흔들리고 위태로운 88만원 세대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여배우 혼자 스튜디오에 들어온 건 낯선 상황이긴 했지만, 그녀이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터틀넥 드레스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
터틀넥 드레스 스텔라 매카트니(Stella McCartney).

정유미에게 그녀의 긴 머리를 감추고 단발 가발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최근작인 드라마 <직장의 신>에 긴 머리로 등장했었으니, 가벼운 짧은 머리로 변신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변신을 응원하는 스태프들과 가짜 머리를 보여주는 게 썩 내키지 않는 그녀 사이의 의견 차이가 천천히 조금씩 좁혀졌다.

“이렇게 거울로만 봐서는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어요. 내 머리가 아니니까 당연히 어색하고, 모든 사람이 다 이 머리가 가짜란 걸 알잖아요. 막상 화면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요. 일단 찍어보면 어떤지 알게 되겠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는 편이다. 숨기거나, 에둘러 말하거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전달하기보다는 돌직구를 날리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이다. 가장하거나 포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가짜 머리에 적응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 선희>에서 정유미가 연기한 ‘선희’는 그래서 못된 여자다. <우리 선희>는 선희라는 여자가 미국 유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세 남자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연기할 때는 몰랐는데 찍고 나니까 선희는 못된 사람이더라고요. 늘 할 말 다하고 용기있는 여자라는 생각도 들어요. 자신의 마음에 누구보다 솔직한 선희가 부럽기도 했어요.”

 

와인 컬러의 니트 드레스 맥큐(McQ).
와인 컬러의 니트 드레스 맥큐(McQ).

정유미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후 <첩첩산중>에서 <옥희의 영화>까지 홍상수 감독과 꽤 많은 작품을 했다. 촬영 당일 아침 일찍 시나리오를 써 배우에게 나눠준 후 바로 촬영을 시작하는 홍상수 감독 특유의 스타일에도 제법 익숙해졌을 법하다.

“어느 순간부터 감독님과 작업하는 게 마음 맞고 좋은 사람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좋은 사람들하고 며칠 촬영했더니 작품이 하나 나오고, 그 작품이 영화제에 초대받고. 홍상수 감독님 촬영장에는 스태프들이늘 그대로예요. 수가 많지도 않고요. 처음에는 영화 때문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만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날 불쑥 감독님이 언제 시간이 되느냐고 물으면 어떨 때는 된다고도 하고, 스케줄이 안 되는 날에는 못한다고 해요. 그러면 또 ‘이번엔 두 번만 나오면 돼’ 하세요. 그럼 다시 날짜 맞춰보고 촬영하러 가는 거죠. 그렇게 가면 아침에 대본을 하나 주세요. 감독님과의 촬영은 한마디로 하자면 이런 거예요. ‘자유롭게 어느 하루를 산다’.”

어쩌면 정유미가 카메라 앞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건 첫 장편 <사랑니> 촬영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니>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유미는 어디로 움직일지 알 수가 없는 배우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이면 카메라가 따라다니는 식으로 촬영했다. 그런데 그녀의 연기가 모두 진짜여서 너무 좋았다.”

“모르겠어요. 여전히 못해요. 때론 틀을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연기하고, 감독의 디렉팅대로 움직여야 할 때는 그렇게 해요. 모든 촬영장은 다르니까. <사랑니> 때는 정지우 감독님이었기에 제가 마음대로 움직여도 그런 연기가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다른 감독님이 ‘그냥 알아서 놀아봐’ 했으면 오히려 불편하고 어색해질 수도 있어요. 무엇이 정답인지 몰라요. 그냥 미리 생각하지 않을래요.”

그러더니 그녀가 불쑥 생각난 듯이 한마디했다. “<사랑니>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좋아하는 영화예요.(웃음)” <사랑니>의 정유미는 참 예뻤다. 아름답다거나 매력적이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다. 그녀가 연기한 열일곱 살의 ‘인영’이 세탁기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며 빨래가 다되기를 기다리는 장면도 그랬고,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 환자복을 입고 서 있을 때도 그랬고, 한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누워 있는 모습도 예뻤다. 돌이켜보니, 정지우 감독의 말마따나 진짜여서 더 예뻤는지도 모르겠다.

 

화이트 티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벌키한 카디건디케이앤와이(DKNY).
화이트 티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벌키한 카디건디케이앤와이(DKNY).

정유미의 연기를 보면서 늘 그녀가 연기한 작품 속 캐릭터들은 인간 정유미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니라고 말한다. “제가 연기한 작품 속 인물들이 ‘나’였던 적은 없어요. 연기하고 있는 건 ‘나’지만 그렇다고 그 캐릭터들이 모두 ‘나’는 아니에요. 진짜 나는 여기에서 지금 당신과 인터뷰하는 정유미예요. ‘연기’는 그래서 재밌어요. 나는 분명 그렇게 안 사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앞으로 더 많이 보여드려야죠.” <직장의 신>을 마치고 <우리 선희>와 <깡철이> 개봉을 앞둔 요즘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이제 더 이상 집착하지는 않아요. 예전에는 쉬지 않고 일하고 싶었어요. 연기를 하지 않을 때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살면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나름대로 방법을 찾았어요. 일하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 운동도 하고, 친구랑 시간도 보내고, 여행도 다니고, 작품 들어오면 시나리오도 읽어보고, 뭐 그러면서요.”

배우라는 직업이 좀 더 편안해졌기 때문일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그러기로 마음먹은 것뿐이에요. 아, 근데 저 오늘 왜 이렇게 ‘배우’라는 말에 부대끼죠? 몇 달간 배우가 아닌 삶을 살고 있다가 짠하고 변신해서 인터뷰하려니까 부대껴요. 나는 그냥 오늘을 사는 사람인데, 아무튼 부대껴요. 엄청.”

 

벌키한 스웨터 3.1 필립 림(Phillip Lim).
벌키한 스웨터 3.1 필립 림(Phillip Lim).

그러니까, 요즘은 배우보다 인간 정유미로 살아가는 시간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그녀는 예전과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과거에는 작품을 하지 않을 때면 집에 축 늘어져 잠만 자며 보냈는데, 요즘은 시간을 쪼개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 정신없이 보내는 중이다. 그건 어쩌면 그녀가 기존 매니지먼트 회사를 나와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제대로 똑바로 살고 싶어요. 물론 그 전에 그러지 않았다는 건 아니에요. <직장의 신>을 하며 유난히 생각이 많았어요. ‘누군가 한때는 자신이크리스마스 트리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은 트리를 밝히는 많은 전구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하찮은 전구끼리도 함께라서 오늘도 살 만하다’는 내레이션도 그렇고, 다른 배우들의 대사 중에도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대사가 많았어요. 많은 고민이 생겼고 그 고민은 모두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죠. 그러던 중에 재계약 시점이 됐고,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됐어요. 그냥 모든 게 운명 같아요” 정유미의 20대가 작품들로 차근차근 채워졌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아요. 연기가 하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단편 하나를 찍고, 또 그러다 보니 첫 장편을 찍고, 다음 작품에 캐스팅되고 드라마도 하고, 그러면서요. 하고 싶은데 못할 때는 속상하지만, 그래도 그런 오늘을 살아야 내일을 사는 거잖아요. 배우로서 잘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음… 요즘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피하고 싶은지도 몰라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뭐든 하겠죠.”

우리는 인터뷰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을 함께 훑어보았다. 그녀는 홀로서기하기로 결정하고 처음 찍는 화보라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며, ‘이거 나가면 죽어버릴 거예요!’ 싶은 컷만 몇 개 말하겠다며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사진을 고르는 기준이 참 애매하다. ‘못생겨 보인다’ 가 아니라 ‘느끼하다’는 게 그 기준이다. 포즈 좀 어색하거나 표정이 약간 과하다 싶은 컷 몇 개를 골라냈다. 그렇게 진짜 정유미 같지 않은 사진 몇 컷을 버렸다. 진심을 담아 진짜를 연기하는 정유미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제 대답 너무 꾸며 쓰지는 말아주세요. 그런 거 견디기 힘들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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