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기울고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삼청각의 스태프들도 분주해졌다. 설날 특집 다큐멘터리 <이영애의 만찬>의 정점을 이룰 만찬을 몇 시간 앞두고, 모든 스태프는 날 위를 걷는 사람들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테이블클로스 간격이 몇 센티가 되어야 할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가 하면, 수저의 위치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테이블을 장식할 초의 높이며, 그릇이 놓일 자리, 전체 진행 시간을 감안한 음식 서빙 간격 등 만찬과 관련한 모든 것이 세심하게 고려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패딩 점퍼 차림으로 일일이 상황을 체크하는 사람은 오늘 만찬의 호스트인 이영애다.
한식 밥상에 담긴 의미를 찾아온 여정의 꼭짓점을 이룰 오늘 만찬의 중심에는 그녀가 있다. 한식 전문가가 아닐뿐더러, 기획의 중심에서 전체 스태프를 아우르는 역할도 그녀에게는 낯선 일이다. 나서기보다 물러서기를 택하곤 하던 그녀를 사람들 앞에 서게 만든 건, <대장금>으로 매일 먹는 끼니일 뿐이던 한식을 오랜 세월 수고와 정성, 깊은 철학으로 완성된 한국 문화의 정수로 인정받게 한 주인공으로서 책임감과 세상의 모든 엄마와 다를 것 하나 없이 아이들의 밥상을 차리는 엄마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녀의 곁을 지키며 자기 일을 팽개치다시피 하며 함께 오늘을 준비해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감히 엄두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롯데호텔 총주방장인 이병우 조리장의 한식은 한식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서구식 코스로 구성했을 때,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란한 겉치레보다는 깊고 우아한 맛과 향을 가진 그의 요리가 오늘의 만찬을 위해 준비됐다. 요리는 물론이고 먹는 사람과 먹는 공간, 상차림을 비롯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것의 어울림까지도 배려하는 것이 한식이다. 한국적인 색감과 질감, 형태감을 살리면서도 모던한 감각을 덧입힌 그릇을 빚는 도예가인 이능호는 이영애의 만찬에 사용될 모든 그릇을 직접 구웠다. 짧은 시일 안에 30인조가 넘는 코스 디너용 그릇을 일일이 빚은 그의 최근 일상은 온통 오늘 저녁을 목표로 흘러왔다.
“내 작품이 누군가의 그릇이 되어 음식이 담기는 걸 직접 보는 일은 흔하지 않아요. 사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일에 매달리면서 힘도 들었지만, 한식의 정신을 담은 최고의 요리가 내 작품에 담기는 걸 보게 돼서 기쁩니다.” 이영애의 오랜 파트너인 한복 디자이너 한은희의 테이블 세팅은 손으로 박음질해 준비한 테이블 매트만으로도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 가득 느껴진다. 댕기를 모티프로 한 의자 장식과 자수를 놓은 냅킨은 그녀가 만드는 한복이 얼마나 고운지 다시금 떠오르게 했다. 이 땅에서 나지 않은 식재료는 상에 올리지 않았고, 전국의 진상품으로 마련한 밥상에서 홍수와 가뭄 같은 재해로 흉작에 시달렸을 서민들의 살림살이를 짐작하고, 소박한 가짓수의 밥상으로 그들의 불운을 함께 느끼던 왕의 밥상, 잔치가 있을 때는 세상 어느 곳의 음식보다 화려한 궁중 음식을 넉넉히 만들어 반가와 나눠 풍습과 전통을 이어갔다는 왕의 밥상이 오늘 만찬에 오른다. 노인과 환자의 영양식이자 배를 주리는 백성을 먹이기 위해 왕이 내리는 구황 음식이기도 했던 죽에서부터 당파 싸움을 멈추고 화합을 도모하자는 영조 임금의 탕평책과 함께 세상에 나온 음식 탕평채, 농사를 짓는 데 귀한 짐승인 소를 먹을 때는 어느 부위 하나 헛되이 버리지 않고 부위별 맛을 살려 감사히 먹었던 소고기 요리와 소통과 화합을 기원하는 비빔밥 등 한국의 음식이 담은 정신과 맛이 담긴 음식들이다. 해가 지고, 청사초롱에 불이 들어오자 리셉션에서 인사를 나눈 게스트들이 속속 만찬장으로 들어섰다. 고운 연둣빛 두루마기 차림으로 손님을 맞던 이영애가 만찬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