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여자가 있다. 방금 전까지 꽃처럼 웃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상대방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어떤 기운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 여자는 순수하고 투명한 소녀처럼 보이지만, 설득이나 양해가 불가능한 내면은 때로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파멸과 불행으로 툭 밀어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육감적인 몸을 가진 것도, 조각한 듯 완벽한 얼굴을 가진 것도 아닌데 표정과 몸짓과 한마디 말로 남자의 이성과 지성을 마비시키고, 도덕과 양식을 잊고 질투에 불타는 수컷이 되게 만든다.
<은교>의 김고은이 등장과 함께 영화계를 흥분시킨 건 연기 경험이 전무한 스물한 살 어린 여배우에게서 그 여자를 봤기 때문이다. 김고은이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하게 될지는 일찌감치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다. 간혹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순서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 김고은이 그랬다. 너무 일찍 만난 은교의 잔영은 사라질 것 같지 않았고, 두 번째 작품이 데뷔작의 강렬함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가 선택한 작품은 <몬스터>다.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였다면 왠지 실망스러웠겠지만, 그렇다고 스릴러도 짐작 밖이다.
“상상만큼 <은교> 다음에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오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다시 학교 다니고, 난 길게 보고 갈 거니까 괜찮아, 하면서도 불안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마침 스릴러 장르에는 늘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항상 여자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구도는 싫었어요. 그렇지 않아서 선택한 것 같아요. 그런 얘기를 자주 하던 때였거든요.”
아직 개봉 전인 영화는 트레일러만으로 <은교>의 기억을 무디게 만든다. ‘복순’은 노점상을 하면서 동생과 둘이 산다. 바가지머리에 손으로 짠 털 조끼와 꽃무늬 남방, 몸뻬 차림의 복순이 무슨 일로 수가 틀렸는지 과도를 뽑아 들고 성질을 피우는 장면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은교는 갔다. 대신 동네에서는 ‘미친년’으로 통하고, 동생을 죽인살인마와 맞짱을 뜨고 껌 씹듯 분을 씹으며 ‘씹새끼’ 같은 19금 욕도 뱉을 수 있는 여자로 김고은은 돌아왔다.
“복순이는 자기한테 소중한 걸 지키려는 아이에요. 그래서 동생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맹목적일 수 있는 아이요. <은교> 할 때 힘들었을 거라고들 하시는데 사실 전 기쁘고 행복했어요. 뭘 몰라서 그랬을 거예요. 앵글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그런 것조차 전혀 몰랐으니까요. 저 하는 걸 보시고 감독님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면서 제 움직임에 카메라가 따라오게 하셨어요. 저는 이건 이렇게 해보자, 어떻게 하면 이거보다 더 잘할 수 있지? 노력만 하면 됐죠. <몬스터>를 찍으면서 정신적으로는 훨씬 힘들었어요. 일단 저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커 버거웠어요. <몬스터>를 하며 이제 현장에 익숙해졌어요. 아, 내가 이렇게 움직이면 카메라 감독님도, 조명 감독님도 힘들구나, 알게 된 거죠. 뉴욕 아시아 영화제 갈 때 정지우 감독님이 제 얼굴이 달라졌다고, 딴사람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몬스터> 속 김고은에게는 <마더>의 원빈 같은 낯섦이 있다. 우아한 외모에 갇힌 동네 바보, 쉽고 만만할 거라는 예측을 벗어나는 막무가내의 자아 같은 것들은 일상적 경험을 통해 조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김고은은 복순이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라는 애초 설정을 버렸다. 교육과 관계를 통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라 보통 아이들과 다른 결을 가지게 된 아이가 되면서 복순은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계산된 분석이나 반복된 리딩으로 얻어진 결과는 아니다. 정해진 캐릭터를 학습하고, 구현하기보다 캐릭터와 만나고 융화되는 과정을 거쳐 자기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김고은이다.
‘분석하려고 하면 백지가 된다’는 김고은의 고백을 불성실이나 신인 배우의 미흡함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김고은이 배우로서 자극을 받고 영감을 얻는 여배우 틸다 스윈턴이나 나탈리 포트만이 생래적 아우라를 더해 자신들의 연기를 완성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성적으로 캐릭터에 접근하고, 장면마다 호흡마다 치밀하게 조율한 연기에 더해지는 무엇. 그것은 배우 자신의 은밀한 방에서 이뤄지는, 아무도 관여하거나 참견할 수 없는 화학적 과정이고, 노력만으로는 꺾을 수 없는 타고난 배우들의 세계다. 아직 김고은은 작품과 세월 속에 제련된 배우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일천한 경험을 가졌을 뿐이지만, 같은 증폭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날, <몬스터> 개봉을 목전에 둔 김고은은 <협녀: 칼의 기억> 막바지 촬영 중이었다. 인터뷰를 끝내고 스튜디오를 나서던 김고은이 돌아와 다시 앞에 앉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까 배우란 직업에 대해 물어보셨잖아요. 결투 신을 찍다 알게된 건데, 내가 남을 다치게 하는 순간도, 남이 나를 다치게 하는 순간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더라고요. 유난히 합이 긴 신이었어요. 중간에 제가 다친 걸 알았는데, 어차피 다친 거 지금 얘기하나 이 신 끝나고 얘기하나 똑같으니까 일단 가자, 하고 찍었어요. 그 신 다 찍고 나니 다들 왜 그걸 참고 있었느냐고 난리였죠. 심하게 다쳐서 결국 그날은 촬영을 계속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내가 배우를 계속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왠지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