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고개를 들지도, 관객에게 말을 걸지도 않은 채 연달아 노래만 부르는 이 심심한 남자를 보기 위해 관객들은 그렇게나 예매 전쟁을 벌인다. 정말이다. 밴드 ‘메이트’로 활동하다 솔로 앨범을 내고 훌쩍 군대에 간 정준일이 전역 후 고작 보름 만에 연 소극장 장기 공연은 열아홉 번 모두 매진되었고 권순관, 재주소년과 함께 오른 콘서트는 같은 날 오픈한 팝 스타 브루노 마스의 내한공연 티케팅에 버금가는 빛의 속도로 빈 좌석이 사라졌다. 잠시의 망설임도 허락하지 않는 예매 열기가 무엇 때문인지 곰곰이 따져보면, 사람들은 말쑥한 외모와 깊은 목소리만큼이나 이 남자의 ‘변덕’에 이끌리는 게 아닐까 싶다. “공연 때는 큐시트를 당일에 바꾸거나 원래 부르기로 한 곡이 아닌데 그날 바로 연습해서 무대에 오르기도 해요. 저 때문에 고생하는 공연 스태프나 세션, 관계자분들에게 죄송하기도 하지만, 공연에 익숙해지는 게 싫어서 나름대로 새로운 걸 자꾸 해보려고 하는 편이에요. 제 마음대로 꾸리는 무대를 관객분들이며 주변 사람들 모두 용인해주시니까 감사할 따름이죠.” 욕심을 감추지 않는 당돌함은 공연에서 백 마디 멘트보다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물론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쓰다듬는 이 남자의 섬세한 모습 또한 외면하기 어렵겠지만.
사실 그는 가수가 아닌 연주자로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스물두 살 때 처음 작곡한 노래로 덜컥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수상을 했지만, 이후로도 몇 년간 정준일에겐 본래의 전공인 재즈 피아노가 유일한 미래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캐나다로 편입 유학까지 간 때, 불현듯 그를 마이크 앞에 세운 것은 사람에 대한 외로움이었다. “재즈 연주가로서의 일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그런데 유학생활을 하면서 느꼈죠. 재즈 연주가는 정말 어려운 직업이더라고요. 간혹 키스 재럿 같은 슈퍼스타가 나오긴 하기만, 재즈는 전 세계 음반 판매량에서 고작 2~3%를 차지할 뿐이거든요. 다른 가수들처럼 앨범을 낸다고 피드백이 활발한 것도 아니고, 또 공연에서도 재즈 연주는 관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느끼기가 힘들고요. 연주를 하면 할수록 제 자신의 내면만 들여다보게 돼요. 평생 수도승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끝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느낌인 거죠. 그게 정말 외로웠어요.” 그런 감정을 달래려고 혼자 만들어 부르던 노래가 서너 곡 쌓인 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가서 등록금을 환불받아 그걸로 비행기표를 사서 무작정 한국에 들어왔어요. 이거 말고 다른 길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그 후엔 학교에서 남은 학기를 다니면서 서울 시내의 특급호텔 바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어요. 피아노 레슨도 하고. 그렇게 돈 벌어서 악기도 하나씩 사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했어요.” 그러다 메이트의 멤버 임헌일과 이현재를 만났고 스물일곱이 되었을 때 마침내 첫 앨범이 나왔다. 밴드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음악 영화 <플레이>, 그리고 입대 직전 발매한 솔로 앨범과 제대 직후 지난 1월에 낸 두 번째 앨범까지 거침없는 행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노래에는 여전히 외로움이 묻어난다. 아프고, 애가 타고, 때로는 가슴 깊숙이 묻어버리는 짠한 감정을 담은 그의 노래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특히 예전 그녀가 떠오를 때면 토이의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듣고, 노래방에서 전람회의 ‘취중진담’을 부르며 슬쩍 옆자리의 그에게 마음을 내비쳤던 추억이 있는 이라면 이 남자의 노래는 그야말로 쥐약이다. 그때의 노래들은 이별한 연인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보다는 아픈 만큼 충분히 슬퍼해도 된다고 다독여주곤 했다. 정준일의 음악은 그렇게 외로움에 공감하며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던 1990년대의 그 노래들과 닮아 있다. 2집 <보고 싶었어요>에서 그는 때로는 현악 스트링으로, 때로는 마음을 간질이는 재즈 리듬으로 풍부한 감정선을 보여주지만, 결코 많은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우직한 멜로디의 ‘고백’이나 서정적인 연주곡 ‘보고 싶었어요’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건 솔직함이다. 자신이 느낀 것에 솔직해지는 것. 설령 그게 조금은 추하거나 부끄러운 것일지라도 말이다. “저도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요즘 사람들이 삶에서 감정을 잘라내는게 싫어요. 저 끝에 뭐가 있는지 뻔히 아는데, 굳이 가봐야 아나? 이런 냉소적인 태도로 몸을 사리고 쿨한 척 행동하는 거요. 저는 제 음악을 듣는 분들이 스스로가 어쩌면 허세 가득한 사춘기의 중학생처럼 느껴지더라도,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의 디테일한 결을 충분히 느끼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행복이 무언지 알 수 있겠어요.”
새로운 앨범으로 쉼 없이 공연을 하며 그는 여전히 음악을 하고 있다. 그가 군인이던 때 허구한 날 면회를 온 절친이자 음악적 동지인 임헌일과 메이트로 합체하기 위한 모의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왜 음악을 하냐고 묻는다면, 제게는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전 음악을 ‘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음악을 사랑하는,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사실 나이가 들 수록 팍팍한 현실에 맞서면서 조금씩 음악에서 멀어지기 쉽거든요. 그러지 않고 좋은 리스너로서 오랫동안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음악을 잘 만드는 것보다도 제겐 소중한 꿈이에요.” 정준일은 음악이 간절한 사람이다. 그의 노래가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래서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