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고등학생이 한 회사의 본부장이 된다. 이토록 황당한 스토리라니. <고교처세왕>은 얼떨결에 아침에는 학교로 등교하고 낮에는 회사로 출근하며 이중생활을 하는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정체를 숨기고 회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같은 부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는 학생이라는 신분도 들키지만 아주 잠깐 위기만 겪을 뿐 곧 다시 사랑을 이어간다. 그리고 급기야 마지막에 이 둘은, 남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러니까, <고교처세왕>은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판타지다. 그리고 서인국은 이 판타지 이야기의 판타스틱한 주인공에 도전했고, 무사히 잘 마쳤다.
그래, 도전이었다. <고교처세왕>에서 서인국은 본부장 행세를 하는 고등학생 ‘민석’과 그에게 이 미션을 떠맡긴 진짜 본부장이 되었어야 할 민석의 형 ‘형석’을 연기했다. 늘 밝고 낙천적이며 장난기 가득한 민석이지만 어떤 날에는 사랑 때문에 울고, 어떤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할아버지가 떠나 울고, 또 어떤 날에는 가장 잘하는 일이었던 아이스하키를 그만 두게 되어 울었다.
“두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게 무척 부담스러웠어요. 극의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형석’을 늘 염두해 둬야했어요. 또 하루에도 몇 번씩 울어야 하는 날도 있었고, 형석이 아닌 민석으로서 우는 날도 있었죠. 드라마에서 형석은 결국 민석을 연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 민석도 연기해야 했죠. 촬영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차 안에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나왔어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죠. 다행히 무사히 여기까지 왔고, 중간에 지치지 않고 끝까지 집중한 저 자신을 수고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어요. ‘너 잘 버텼다’라고.”
그리고 그 힘든 날들은 이제 모두 과거가 되었다. 서인국이 마리끌레르 카메라 앞에 선 건 드라마가 끝난 지 고작 3일이 지난 때였다. 그 3일간 팬들과 극장에서 마지막 회를 봤고, 또 그 다음 날에는 <고교처세왕>을 함께 만든 스태프, 배우들과 함께 MT도 다녀왔다. 드라마를 끝낸 소감을 묻자 그는 소름이 돋은 팔을 보여주었다. “작품을 끝낸 소감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면 이렇게 소름이 돋아요. 지금 이게 무슨 감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늘 화보 촬영이 끝나면 드라마 촬영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고, 내일도 새벽같이 일어나 촬영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여전히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감정이 들어요.”
어쩌면 그는 아직 일상의 서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터뷰를 위해 성수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마주한 그는 자연인 서인국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너무 힘들어요. 저는 원래 이렇게까지 얌전한 사람이 아니에요.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고 잘 웃고 목소리도 좀 하이톤이죠. 이런 데 오면 여기저기 막 누비고 다니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난 후부터 아주 얌전해졌어요. 아직 제 궤도를 못 찾았나봐요. 여행을 한 번 가고 싶어요. 지금껏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거든요. 여행을 가면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인국은 지금 <응답하라 1997>이 끝났을 때와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투리마저 멋있고 사랑스러웠던 ‘윤제’는 ‘멋진 놈’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무심한 척 시크하게’ 여자를 챙길 줄도 알고, 게다가 순정남이다. 멋있으려고 작정한 캐릭터나 다름없다. 1990년대 문화를 꼼꼼히 담아낸 드라마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건 물론이고 윤제에 대한 인기도 좋았다.
“<응답하라 1997>이 끝난 뒤엔 마냥 신났어요. 멋모르고 덤빈 작품이죠. 그런데 <고교처세왕>이 끝난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연기에 대한 생각이 훨씬 더 진지해졌어요. 요 며칠 훌쩍 자란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정신적인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달라졌어요. 저조차 신기할 만큼.” 그는 요즘 발견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연기를 대하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시간.
<고교처세왕>을 촬영하면서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시간에도 그는 형석으로 살았다. 그건 그가 연기를 시작하고 생긴, 일종의 습관 같은 거다. 모두가 알다시피 서인국은 수많은 시청자가 함께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알렸다. 자연스러운 수순은 앨범을 내는 것이었고, 피 말리는 오디션을 통과한 만큼 노래 실력은 뭐, 의심할 바 없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윤아와 장근석이 주인공을 맡은 드라마 <사랑비>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는 너무 무서웠어요. 처음 해보는 것이기도 했고, 가수가 연기를 하면 저부터 색안경을 쓰고 봤으니까요. 나 하나 때문에 작품이 망가지고 함께 출연한 배우들의 진정성까지 묻힐까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서인국을 숨기기로 했죠. 일부러 살을 찌우고 머리도 기르고 촌스러운 뿔테 안경을 섰어요. 무서워서 역할 뒤로 제가 숨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영화 <노브레싱>과 드라마 <주군의 태양>을 할 때는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에도 작품 속 인물처럼 행동했어요. 왜냐하면 같은 시기에 두개의 작품에 들어갔는데 캐릭터가 많이 달랐거든요.
<노브레싱>에서는 천방지축 개구쟁이 남자아이를, <주군의 태양>에서는 누군가를 늘 지켜주고 말이 없는 경호원을 연기했으니까요. 그래서 촬영장에 가면 온전히 그 캐릭터로만 살았어요. <노브레싱> 촬영장에서는 길바닥에도 드러눕고 장난치고 그러다가, <주군의 태양> 촬영장에 가면 있는 듯 없는 듯 아주 조용하게 있었어요. 그렇게 조금씩 생긴 습관 때문에 <고교처세왕>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흐트러졌을지도 몰라요.”
서인국은 지금 빛나는 청춘의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그가 말하기를 지금이 두 번째 빛나는 청춘의 시기라고 했다. “제게 가장 아름다웠던 청춘은 고등학생 때부터 스물세 살 때까지였어요.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을 꿨고, 꿈이 이뤄질 거라고 믿었어요. 주변에서 ‘그게 말이 되냐’ ‘한심하다. 웬 가수냐’라고 말해도 저는 흔들림 없이 간절하게 꿈꿨어요. 그 꿈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 시절이 제게는 가장 빛나는 청춘이었죠.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청춘의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 <고교처세왕>을 촬영하면서 촬영장과 민석을 참 좋아했어요. 그만큼 제 모든 것을 쏟아냈고요. 제게 청춘이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올인할 수 있는 때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또 그런 순간이 오겠죠. 올인할 대상이 연기일지, 음악일지 혹은 완전히 다른 것일지 예상할 수는 없어요. 다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지금이 지나고 언젠가 또 오게 될 청춘을 기대한다는 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