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틀넥 니트 톱 세린느(Celine).

슬리브리스 톱과 플레어스커트 모두 디올(Dior), 그레이 롱 코트 세린느(Celine).

퍼플 니트 원피스 랄프 로렌(Ralph Lauren), 코트 까르벵(Carven).

베이지 니트 톱 아크네(Acne Studios), 와이드 팬츠 고소영(Kosoyoung).

블랙 시스루 블라우스와 레더 원피스 모두 프라다(Prada).

지금 한지혜는 10월 방영을 앞두고 있는 <전설의 마녀> 촬영에 막 들어간 참이다. 우리가 만난 때는 드라마가 방영이 아직 한참 남은 때였음에도, 그녀는 이미 강화도와 전북 익산을 오가며 꽤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MBC 주말드라마 <전설의 마녀>는 여자 교도소에서 만난 네 명의 여성 수감자가 출소 후 마음을 모아 빵집을 차려 대기업의 베이커리와 맞서는 내용이다. 한지혜는 이 드라마에서 ‘수인’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어느 재벌가 맏아들과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지만, 몇 년 후 남편이 죽는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결혼도 반대했던 재벌가 시댁이 수인을 탐탁히 여길리가 없다. 그녀는 ‘똥이나 먹고 살아라’ 따위의 상상할 수 없는 막말과 온갖 구박 속에서도 말대꾸 한마디 하지 못하고 꾹꾹 눌러 참는다. 그렇게 눈물 마를 날 없이 지내던 그녀는 어느 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심약하고 늘 당하고 울기만 하던 여자의 인생이 반전을 맞는다. 여자는 강해졌고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었다. 한지혜가 연기하는 수인은 그런 여자다.

자칫 드라마 내용이 무겁고 우울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주말 드라마답게 밝고 유쾌하게 네 여주인공의 삶을 그려낼 예정이다. “재미있는 캐릭터가 많이 등장해요. 오현경 선배님이 몸매 빵빵하고 외모 출중한, 사기꾼 기질을 타고났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김수미 선배님도 나오세요. 특히 김수미 선배님이 극에서 재미있는 역할을 많이 해주실 것 같아요. <전설의 마녀>는 주말 드라마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다 갖췄어요. 상당히 밝고 유쾌하면서 확실한 스토리가 있죠. 그리고 그 스토리가 익숙한 듯 익숙하기만 하지도 않아요. 일주일에 한두 시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줄 수 있는 드라마예요.” 언제부터인가 한지혜는 주말 드라마를 책임지는 믿음직한 여배우가 되었다. <메이퀸>에서는 억척스러운 말괄량이 캔디로 분했고, <금 나와라 뚝딱!>에서는 전혀 다른 색깔을 가진 두 캐릭터를 안정적으로 연기하며 존재감을 인정받았다. “수인이는 내가 진짜 잘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캐릭터예요. 저도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는 뭐든지 다 잘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품을 고를 때 잘할 수 있는 역할인지 먼저 보게 되더라고요. 무모하게 도전해서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는 제 매력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작품을 찾게 돼요. 잘할 수 있는 일을 더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어느새 <낭랑 18세>의 철부지 아가씨는 이제 촬영장에서 선배를 챙기고 후배를 보듬는, 꽤 막중한 책임을 지는 연차의 배우가 되었다. “지금 제가 딱 중간 위치에 있는 것 같아요.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 저는 선배님들을 모시며 배울 것도 많고, 후배들은 편하게 대하며 챙겨줘야 하죠. 그런데 그런 게 재미있어요. 저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아요.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되었어요. 배우 생활을 오래 하고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고, 저는 아무렇지 않은데 괜히 저를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점점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현장에 나와서 일하면 자신에게 도전도 되고 자신을 북돋울 수도 있어 좋아요.”

<태양을 가득히>는 끝나고 <전설의 마녀>를 시작하기까지 그녀는 잔잔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캐스팅이 결정되고 가볍게 다이어트도 했고, 이전부터 해오던 꽃꽂이도 계속 배우고, 드라마에서 입을 의상 시안도 정하며 보내는 여유롭고 건강한 일상.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은 늘 그렇게 조용한 편이다. “<금 나와라 뚝딱!>을 할 때 김지영 선생님이 극 중 외할머니였어요. 선생님은 작품을 하지 않을 때 지방 오일장을 다니신대요. 오일장에 가면 다양한 인생사를 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연기를 오래 하신 분이 여전히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에 자신만의 방법으로 연기 공부를 하시는 거예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의 오일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투리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저도 쉴 때 가끔 오일장에 가봐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 얘기를 들려주면서 하는 말이 연세가 많으신데도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시장에 갈 때도 벙거지를 눌러쓰고 다니셔야 한대요. 배우라는 직업은 어떤 면에서 고단한 일이기도 해요. 한번 알려지고, 한때 누린 인기가 유지되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요즘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물어볼 거 아니에요. 그러면 얼마나 힘겨울까요?” 그럼에도 배우는 여전히 그녀에게 좋은 직업이다. 그리고 요즘 들어 그 확신이 점점 굳건해지고 있다. “배우란 은퇴가 없는 직업인 것 같아요. 대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고 긴장감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하죠. 외모만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실력이 없으면 작품을 계속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고요. 저는 여전히 모자라는 부분이 많아요. 계속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배워야겠죠. 다행히 지금까지는 작품을 꾸준히 해왔어요. 내가 캐스팅 1순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기회는 왔죠. 기회가 왔다는 게 중요하고, 찾아온 기회를 다행히 잘해낸 것 같아요.”

<전설의 마녀>의 수인은 극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가녀리고 눈물 많고 언제나 약자일 것만 같던 그녀가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마녀가 된다. 그 마녀는 이제 소리 지를 줄도 알고, 세상에 맞설 힘도 낼 줄 아는 강한 여자다. 그런 순간이 한지혜에게도 있었다. “몇 년 전에 작품을 하면서 사람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어요. 외롭고 고독하고 마음이 아픈 나날을 보냈어요. 방에 혼자 있을 때 불을 끄기조차 두려운 시간이었죠. 어쩌면 그때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는지도 몰라요. 그런 일을 겪어 좋은 건 눈물 연기가 수월해진 거예요. 연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눈물 한 방울이 아까울 정도였는데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니 슬픔을 표현하는 일이 쉬워지더라고요.” 그리고 결혼도 그렇다. 아니, 그녀에게 결혼은 터닝 포인트라기보다는 치유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사람 때문에 힘든 경험을 하고 나니 한동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늘 저도 모르게 긴장하더라고요.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들어졌어요. 결혼을 해서 가장 좋은 건 남편과 함께하는 순간은 언제나 편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남편을 만나고 예전보다 사람을 만나는 게 좀 더 편안해졌어요.” 아무도 모르게,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꽤 단단해지고 있다. 그 단단함으로 지난 상처는 무뎌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법에 유연해지고, 촬영장에서는 능숙해지며 단단한 여배우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