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배우는 많다. 오늘은 이 배우에게 반했다가도 내일이면 저 배우가 더 눈에 밟히는 게 영화를 보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래도 어떤 배우들에 대해서는 그가 새로운 작품을 들고 돌아올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고, 그의 스크린 속 모습에 설렌다. 관객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오롯이 배우의 역량이다. 오랫동안 멋있는 모습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 배우 진백림은 자신의 몫을 잘해왔다. 그의 이름은 한국 관객에게는 아직 조금 낯설지 모른다. 진백림은 열아홉이던 2002년 <남색대문>이라는 영화로 대만에서 데뷔한 이래 중화권에서는 줄곧 청춘을 상징하는 배우로 통해왔다. 대만을 벗어나 홍콩, 중국, 일본에서까지 드라마와 영화 작업을 해왔으니 어찌 보면 그동안 우리만 그를 몰라본 것일 수도 있겠다. <남색대문>의 풋풋하던 고등학생은 <쿵푸덩크>의 열혈 농구부 주장과 중국 쓰촨 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음산>의 방황하는 청년을 거쳐 마침내 2011년 드라마 <연애의 조건>의 말쑥한 남자 ‘리따런’에 이르게 된다. 대만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에서 진백림은 오랜 이성 친구를 짝사랑하며 그녀의 곁을 지키는 속 깊고 자상한 남자를 연기했다. 리따런의 등장에 대만 전역의 여심이 들썩였음은 물론이다. 당시 국내 네티즌 사이에서도 <연애의 조건>은 제법 화제가 되었다. 하지원과 이진욱 주연으로 올여름 방영된 드라마 <너를 사랑한 시간>은 바로 이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마침 올해 진백림은 손예진, 신현준과 한중 합작 영화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를 찍었고, 연이어 하지원, 천정명과 영화 <목숨 건 연애>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계 진출 소식을 알렸으니 국내 관객으로서는 또 한 명의 주목할 남자 배우를 막 알게 된 셈이다.

촬영장에서 만난 그는 명성에 걸맞게 14년간의 연기 경력이 느껴지는 능숙한 포즈와 표정을 보여주었고, 그간 일해온 곳이 아닌 낯선 환경에서도 오랜 기간 프로로서 활동해왔음이 느껴지는 노련한 태도로 촬영을 이끌었다. 게다가 꽃미남의 정석을 따르는 고운 얼굴은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게 소년 같은 구석이 있다. 여러모로 인기 스타임을 실감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인간 진백림’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알게 된다. 필모그래피가 40여 편이 넘도록 매년 쉬지 않고 달려 연기하며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말할 만큼 휴머니티를 잃지 않는 남자. 삶을 깊이 사유하고 자신을 성찰하려 노력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유쾌하고, 여유 있고, 솔직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소년 같은 미소를 보여주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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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페도라 아페쎄(A.P.C.), 가죽 블루종 발렌티노(Valentino),안에 입은 화이트 셔츠 유니클로 앤 르메르(Uniqlo and Lemaire),팬츠 디올 옴므(Dior Ho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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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비 컬러 재킷과 팬츠 모두 디올 옴므(Dior Homme), 면 티셔츠 버버리 브릿(Burberry Brit), 가죽 브레이슬릿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s & Jewelry).

하지원과 영화 <목숨 건 연애>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어떤 영화인가? 이제 촬영에 들어가는 단계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하지원이 추리소설 작가인 ‘제인’ 역할을, 천정명이 형사인 ‘록환’ 역할을 맡았고, 두 사람은 우연히 연쇄 살인 사건을 쫓게 된다. 나는 그 와중에 제인 앞에 나타나 그녀와 로맨스를 만드는 조금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라고 할까? 이틀 후에 첫 촬영에 들어가고, 4일 전에 다 같이 대본 리딩을 했다. 모두들 프로페셔널하고 재능이 대단하더라. ‘이거 재미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온전히 한국 영화라 중국 스태프가 한 명도 없다. 나와 매니저 ‘리’뿐이다. 꽤 부담이 되기는 한다. 그래도 이번엔 영어 대사만 있어서 한시름 놓았다.(웃음) 모레 촬영하는 첫 신이 마침 하지원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실제로도 그녀와 처음 얼굴을 맞대고 일을 시작하는 셈이니까 아마 꽤 리얼한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웨이보에 한국어 더빙을 하는 모습을 올리기도 했다. <나쁜 놈은 반드시 죽는다>를 찍을 때다. 한국어 더빙 연기는 나에겐 재앙에 가까웠다.(웃음) 물론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한국어는 문법상 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문장 끝에 올 때가 많아서 타이밍을 잘 맞춰야 했다. 상대 배우가 중요한 말을 하기도 전에 무심결에 너무 빨리 반응해버리면 안 되니까. 이 영화 전에 <디스턴스>라는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게 끝나고 이 영화를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딱 4일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한국어 대본을 받고는 일단 대사를 몽땅 외웠다. 당연히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른 채 겨우 발음만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고는 한국어 문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2주 정도 지나니 대사의 뜻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

뜻도 모르는 대사를 4일 만에 다 외우다니 당신은 천재인가? 아니다.(웃음) 난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느냐에 달린 거다. 나 자신에게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하고 물어보면 대답은 하나다. 잘해냈는지는 몰라도 최선은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올해 특히 쉬지 않고 연이어 영화를 찍었다. 한국에 진출하기 직전에 찍은 <디스턴스>에선 3명의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들었다. 싱가포르 감독인 앤서니 첸이 제작한 영화다. 그와 함께 하는 첫 작업이었다. 관계에 대한 영화다. 아버지와 아들 또 그의 자식, 사형수가 된 오랜 친구와 맞닥뜨린 남자, 어린 시절 선생님을 사랑했던 교수와 그 교수를 흠모하는 견습생 등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카르마 같은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와 나 둘 다 <디스턴스>에 집착하다시피 몰두했고, 크랭크인 전부터 영화를 찍는 내내 매일 붙어 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옴니버스영화로 세 개의 스토리, 3명의 주인공이 있고 그게 전부 내 몫이었다. 각 캐릭터가 말투, 행동, 표정이 다 달라야 하는데 다음 스토리를 촬영하기 전까지 딱 이틀씩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앤서니 첸과 촬영 로케이션, 대본, 다른 배우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상의했다. 우리는 이 영화가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표현되길 바랐다.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그 과정은 자못 흥분되는 일이었다.

작품을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뭔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 난 그건 순전히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고, 그냥 내 것이 되는 작품들이 있다. 타이밍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연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사실 당시의 내 기분과 연결되는 것 같다. ‘오, 이거 좋아’, ‘윽, 이거 싫어’, 이거다. 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완벽한 환경, 완벽한 시나리오, 완벽한 타이밍, 모든 걸 갖춘 상태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거다. 다만 난 똑같은 걸 하고 또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항상 전작과 다른 걸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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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한 프린트의 니트 풀오버와 팬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실버 네크리스 구찌 타임피스 앤 주얼리(Gucci Timepieces & Jewel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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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온 슈즈 루이 비통(Louis Vuitton).

한국에서도 당신은 <연애의 조건>의 완벽한 남자친구 리따런 역할로 많이 알려져 있다. 웨이보에는 ‘천년을 수행해야 리따런 같은 남자를 얻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돌았다. 그 역을 연기할 때가 딱 스물여덟, 스물아홉 시절이었다. 극 중 리따런과 비슷한 나이였고, 그래서 리따런의 사랑이 어떤 건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러는지, 무슨 결정을 내릴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대본을 읽어보고 이거 잘할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연애 경험에 비추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 그렇치만 그런 경험이 많았다는 뜻은 아니다.(웃음) 다만 그런 연애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대충 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리따런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얼마 전 한 대만 잡지가 10대 여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표에서 남자친구 삼고 싶은 배우 1위를 차지했다. 14년째 배우로 일하고 있는데 여전히 인기가 대단하다. 집계 실수가 있었던 거 아닐까?(웃음) 솔직히 나는 내가 팬들을 어떻게 만족시키는지 잘 모르겠다. 난 팬 관리를 정말 못한다. 그냥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고, 계산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배우가 되고 나서 후회는 없나? 대만에서 사생활이 전혀 없다는 것 빼고는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내 작품이 나의 당시의 인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내 일은 마치 다이어리를 쓰는 것 같다. 예전에 찍은 작품을 보며 내가 당시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걱정을 했는지 돌아볼 수 있다. 가끔 특정 신을 보면 그때 내가 어땠는지 떠오른다. ‘아, 저 때 배가 갑자기 엄청 아팠었는데. 아닌 척했지’ 이런 거 말이다.(웃음) 올해 한국에서 작업한 작품들도 나중에 돌아보면 진짜 열심히 했었구나,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인간 진백림으로서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언젠가 TED 강의를 본 적이 있는데, 한 피아니스트가 나왔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눈을 빛내며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도 행복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으로 비쳤으면 좋겠다. 나와 있을 때는 사람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영화에 나오고, 어떤 걸 이뤘고, 이런 것보다 사람들이 나와 함께할 때 어떤 걸 느끼는지가 나에겐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