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끌레르 코리아 - 하정우의 자리

마리끌레르 코리아 - 하정우의 자리

블랙 니트 스웨터 닐 바렛(Neil Barrett), 화이트 셔츠 골든구스(Golden Goose).

수없이 많은 배우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보면 누군가는 더 이상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경우도 있고, 반면 누군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점점 더 키우며 견고히 하기도 한다. 나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하정우가 전도연의 보디가드를 연기하며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윤종빈 감독의 대학 졸업 작품이자 하정우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개봉을 앞둔 무렵이었다. 돌이켜보면 스튜디오 안의 모두가 서툰 시절이었다. 카메라 앞의 신인 배우도, 촬영하던 포토그래퍼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그때 막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화보 촬영을 위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어색한 하정우였지만 그때도 그는 이미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2천만원을 들여 찍은 윤종빈 감독의 첫 장편영화인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하정우는 평단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온갖 영화 잡지에서는 그를 라이징 스타로 꼽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마리끌레르 코리아 - 하정우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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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하프 재킷 랙 앤 본 바이 비이커(Rag & Bone by Beaker), 브라운 스웨트셔츠와 티셔츠 모두 마우로 그리포니 바이 비이커(Mauro Grifoni by Beaker).

하정우가 ‘하와이 피스톨’을 연기한 <암살>은 천만 영화가 되었고, 관객 수가 1천만 명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촬영장에 있었다. 데뷔 이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하정우는 한 번도 작품을 쉬어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새로운 작품 속 누군가가 되어 있었고, 그간 감독으로서 두 편의 작품을 연출했으며, 화가로서 전시회도 열었다. 하정우가 마리끌레르와의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날은 잠시 <아가씨> 촬영이 없는 때였다. 스튜디오 안에서의 하정우는 모든 행동을 ‘성큼성큼’ 했다. 어느 순간에도 주저하는 법은 없었다. 촬영을 위해 준비한 의상을 볼 때도, 메이크업 룸에 들어설 때도, 카메라 앞에 설 때도, 잠시 쉴 때도 그는 항상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마도 그는 그 속도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것이리라. “지치지 않아요. 촬영하다가 힘들 때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운동을 하면서 견뎌요. 전형적인 대답이지만 작품하는 동안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방법은 그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떨 때는 하루에 10시간씩 산책을 하기도 해요. 아침에 나가서 걸어서 팔당대교까지 걷는 거죠. 귀찮으면 택시를 타고 돌아오기도 하고 힘이 남으면 다시 걸어서 돌아와요. 드러나지 않을 뿐 작품과 작품 사이에 쉴 때도 있어요. 홍보 일정과 다음 작품 촬영이 겹치면 좀 일이 많긴 한데, 뭐, 할 만해요. 물론 배우는 감정적인 소모가 큰 직업이에요. 연기하며 소모하는 것들은 연기를 통해 다시 채워 나가요. 촬영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며 다시 채우는 거죠. 배우가 연기를 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나를 채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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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셔츠와 네이비 팬츠 모두 골든구스(Golden Goose), 선글라스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블랙 슬립온 슈즈 아쉬(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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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 스웨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그레이 조거 팬츠 미하라 야스히로 바이 무이(Mihara Yasuhiro by MUE), 블랙 슬립온 슈즈 아쉬(Ash).

하정우는 데뷔 이후 10년간 30편이 넘는 영화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아이를 갖기 위해 돈을 주고 관계를 맺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이민자인 적도 있었고, 소름 돋는 살인마이기도 했으며, 아내를 찾아 헤매는 조선족이거나 테러리스트와 맞서는 앵커, 혹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스파이가 되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끌리는 인물과 영화가 있어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왠지 궁금하고 연민이 느껴지는 그런 거.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괜히 궁금하고 이상하게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캐릭터에 관심이 가요. 그러고 보면 사람을 만날 때도 상대방을 자연스레 관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니, 관심이 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그리고 새로운 인물을 이해하려면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나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넓고 많은 걸 포용할 수 있어야 그 인물을 이해하는 폭도 커지니까요.” 우리가 만나는 하정우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작품을 벗어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의 말마따나 그냥 살아간다.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을 돌보며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그냥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 그리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자유롭게 산다는 건 솔직하고 진실하게 산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요. 솔직하지 못한 삶은 뭔가를 감추기 위한 거짓된 삶 같아요. 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관객은 배우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고 느껴요. 관객 앞에 나서려면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민낯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숨기려 해봤자 관객은 분명히 다 알아요. 연기하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내 연기를 솔직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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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헤링본 톱과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롱 재킷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구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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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하프 재킷 랙 앤 본 바이 비이커(Rag & Bone by Beaker), 네이비 팬츠 우영미(WooYo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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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넥 니트 스웨터와 화이트 셔츠, 하운드투스 팬츠 모두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그의 대답은 대부분 진지했고 허투루 말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대화가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했던 건 아니다. 가끔은 엉뚱하게 웃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뭐 이런 식이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잡지를 본 그가 뜬금없이 이 잡지는 누구 거냐고 묻거나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명함도 주지 않고 시작하느냐며 따지듯 말할 때, 이상하게 웃기다. 자꾸 들으면 중독된다는 이 남자의 유머는 그가 연출한 <롤러코스터>에서 이미 보여준 적이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웃기고 황당한 장면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영화의 유머 코드는 전형적인 유머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제 유머는 호불호가 좀 갈려요.(웃음) 저를 좀 알면 제 유머 코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보편적이지 않을지도 몰라요. 유머라는 게 원래 상대적이니까요. 저는 블랙코미디에 끌려요. 배우로서 영화를 선택할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인 작품을 고르게 돼요. 감독이 내게 요구하는 것에 집중하고 투자사가 내게 바라는 것도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감독으로서 하정우는 나 자신이 재미있고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연출은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에요. 감독으로서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계속 작품을 해나가는 거예요. 나아가다 보면 점점 더 색깔이 또렷해지겠죠. 그러다 보면 좀 더 많은 관객이 공감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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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셔츠와 네이비 팬츠 모두 골든구스(Golden Goose), 선글라스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 시계 아이더블유씨(I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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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트 스웨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그러고 보면 하정우는 한 번도 확신을 잃은 적이 없다. 배우로서 살고 싶다는 확신이 있었고, 연출을 해야겠다는 욕심도 가졌다.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전해진 태생적인 무언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 모든 사람이 비슷한 것을 가지고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담금질하느냐가 중요하죠. 신은 인간에게 똑같이 재능을 줘요. 중요한 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실천하며 행동에 옮기느냐죠. 당신은 어떻게 시나리오를 분석하느냐, 그림은 어떻게 그리느냐, 연출은 또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저에게 특별한 게 있었던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만 내 삶을 위해 하고 싶었고 그래서 노력한 게 전부예요. 전 분명 노력형 인간이에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촬영이 끝나면 김성훈 감독의 <터널>이 시작된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그는 연기하며, 그림을 그리며 삶을 촘촘하게 채워나갈 것이다. 문득 그런 그에게도 지금껏 이루지 못해 아쉬운 게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 전 어릴 때 막연히 이맘때쯤 세계적인 배우가 될 줄 알았어요. 진짜예요. 20대 때 그 꿈이 처참히 깨졌죠. 진심으로 아쉬워요. 지금은 세계적인 배우 겸 감독이 되는 게 꿈이에요.” 아마 지금처럼 살아가다 보면 농담 같은 그의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올해를 시작할 때 올해는 재미있게 놀자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 논 한 해인 것 같아요. 일도 많았고 전시회도 했고 쉴 때 여행도 다녀왔고, 진짜 재미있게 놀았어요. 돌이켜보면 20대보다 30대가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하정우는 놀 때 어떻게 노는데요?” ”음, 그건 구체적으로 공개할 수 없어요.(웃음). 일단 30대가 되니 술이 더 맛있어졌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30대에 마시는 맥주가 더 맛있더라고요. 40대도 기대돼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땐 결혼도 했겠죠. 뭔가 좀 더 안정감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 보통의 삶을 기대해요. 그리고 그런 삶에 만족하는 저를 기대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