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복수와 용서는 수세기 전부터 고전이 사랑한 이야기 재료다. 형태와 구조만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도 숱한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차용되는 데는 그만큼 풀기 어려운 삶의 근원적인 질문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평생의 짝이라 생각한 연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마가 사형을 언도받았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 그 살인자에게 순수하고 예쁜 딸이 있다면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해도 될까? <더 테러 라이브>를 각색한 박은경·이동하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화 <비밀>. 살인자의 딸을 데려다 키운 형사, 그리고 피해자의 약혼자가 10년 뒤 다시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갈등의 중심축인 살인자의 딸 ‘정현’, 그 무거운 왕관을 김유정이 썼다.
말도 잘 못하던 네 살 때부터 카메라 앞에 선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출연을 결정한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영화 <비밀>의 의미는 크다. 인터뷰 중 그녀는 ‘느꼈다’, ‘생각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찰나의 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거나 뭉개지 않고, 세세하게 느끼고 깊이 생각하려 애쓰는 그녀의 평소 생활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작품의 무게를 견디며 좋은 배우라면 한번쯤 경험할, 몰입이 동반하는 공포를 생애 처음으로 느꼈다고 고백했다. 연기는 무섭지만 가야 하는 길이고, 자신을 계속 앞으로 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결국 연기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배우이자, 열일곱 살 소녀가 겪을 감정의 동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마주한 진한 눈빛과 풍부한 표정에서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을 봤다. 감탄하는 사이 그녀가 해사한 미소의 소녀로 돌아와 알밤을 내밀었다. “이거 저희 엄마가 아침에 삶은 밤이에요. 제가 밤을 아주 좋아해서 잘 아는데요. 이거 되게 맛있는 밤이에요.”
<비밀>은 고통스러운 용서에 대한 이야기죠. 열일곱 살이 아니더라도 이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주제예요. 시나리오 읽고 느낌이 어땠어요? 보통 시나리오를 보면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는데 <비밀>은 잘 보이지 않았어요. 제 또래 아이가 겪기 어려운 일이고, 설사 경험했다 하더라도 온전히 버텨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어린 시절, 옷장에 숨어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아이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까? 그걸 계속 생각했어요.
단편적인 감정의 연기가 아닌 여러 개의 층이 켜켜이 쌓인 복잡한 캐릭터예요. 이런 작품을 해온 배우들이 종종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하잖아요. 어땠나요?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는 그 말을 처음 경험했어요. 그리고 몰입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도 알았어요. 이전까지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도 없을뿐더러 지금보다 생각하는 힘이 적었기 때문인지 얼렁뚱땅 일상으로 돌아왔거든요. 당시 영화 <비밀>과 드라마 <앵그리맘>을 연달아 촬영했는데 <앵그리맘>의 ‘아란’이라는 역할도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친구의 자살을 경험한 아이라 쉽지 않았어요. <비밀>을 촬영하면서 친해진 스태프 한 분이 쫑파티에서 제가 두 작품을 동시에 찍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앞으로는 지금처럼 강도 높은 역할을 선택할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그때만 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는데, 그 이후에 두 개의 역할을 한 만큼 두 배로 감정이 몰아쳤어요. 묘했죠. 김유정이라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어요. 캐릭터에서 빠져나온다는 말은 곧 나를 찾아 돌아오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비밀>의 정현이와 <앵그리맘>의 아란이가 제 양옆에 서 있다가 떠나면서 제 일부를 함께 떼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렇게 계속 연기를 하면 나 다 없어지는 거 아니야?(웃음) 했죠. 앞으로 역할을 결정할 때 이런 상황도 고려해야겠구나 싶었고요.
앞으로 연기를 하면서 배우로서 성장통도 겪어야 할 텐데요. 지금이 그 시기인 것 같아요. 내가 성장통을 겪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알아챌 정도예요. 하지만 쑥쑥 자라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이 순간을 자세히 느껴보고 기억하려고 해요. 이 과정을 지나야 제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무엇이 먼 미래의 순간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내게 더 이로울까 한번 더 생각해봐요. 훗날 지금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하길 참 잘했다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저 혼자 결정하는 걸 연습하는 시기인 것 같아요. 사소한 고민도 많아요.(웃음)
생각이 많아서 그럴까요? 의외로 목소리가 작고, 말수가 없어서 놀랐어요. 어릴 때는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도 못했어요. 촬영장에서 하루 종일 참은 적도 있죠. 중학생 때부터는 말도 많아지고 목소리도 컸는데 지금은 다시 바뀌는 거 같아요. 자꾸 조심하게 되고 덜 말하려고 해요. 조용히 말하고, 가만히 있는 게 되레 편해요. 내가 어떻게 했을 때 편안하고 좋은지 인지하면서 진짜 나를 알아가는 것 같아요. 그 과정이 너무 좋고 재미있어요. 제 안에 큰 기둥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성격이라 바로 감정이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앞으로 조심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게 상대방에게도, 또 저에게도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싫으면서 억지로 하는 건 저도 싫죠.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때로는 하기 싫은 것도 마음을 잘 바꿔서 해내야 하는 것도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 중에는 연기를 학습한 탓에 지나치게 기계적인 연기를 하는 이들이 더러 있죠. 그런 면에서 유정씨는 유연하게 성인 연기로 진입한 편이에요.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도 받았고요. 배운 연기가 아니기 때문일 거예요. ‘이 대사는 이렇게 쳐야 해’ 하는 식으로 가르쳐준 사람이 없어요. 연기학원을 다닌 적도 없고요. 인식이 박혀 있는 게 없으니까 자유롭게 연기하는 편이죠. 물론 그 자유로움도 제가 계속 답습하다 보면 나쁜 습관이 될 수 있겠죠. 옆에서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제가 계속 조심해야 해요.
시나리오 쓰는 게 취미라고요. 그날그날 잠깐의 기분이라도 문장으로 쓰려고 노력해요. 거기에서부터 시나리오가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줄의 생각이 열 줄이 되고, 그 열 줄들이 모여 장면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연습을 하죠. 버스정류장에 누가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을 풀숏으로 보면서 스토리를 붙여나가는 거예요. 글을 쓰다 보면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어 마음이 편해져요. 평소에는 너무 많이 주위를 살피면서 지내야 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주변을 보지 않아도 되거든요.
오늘 아침에도 영화를 보고 왔다고 하던데, 어떤 영화를 좋아하나요? <로렌스 애니웨이>나 <러블리 본즈>처럼 묵직하게 와 닿으면서도 잔잔한 여운이 있는 작품들이 저와 잘 맞아요. 아침에 본 <레인 오버 미>도 좋았어요.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상황에서 무언가 하나는 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해요.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어! 저런 표현도 가능하구나,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하는 순간이 많거든요. 저는 그분들보다는 경험이 적으니까 책이나 영화, 사람들의 관계도 연기의 눈으로 보게 되는 거예요.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배우는 연기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장면을 이런 각도로 찍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 캐릭터의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죠. <비포 선라이즈>에서 줄리 델피가 연기한 ‘셀린느’ 같은 캐릭터도 좋아요. 상황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거기에 잘 녹아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