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작은 도시 포카라(Pokhara)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1년 내내 눈에 덮인 산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은 커다란 페와 호수를 만들었고, 그곳의 사람들은 이 맑은 호숫가에서 빨래를 하기도 하고, 추운 줄도 모르는 아이들은 호수에 풍덩 뛰어들기도 하며, 젊은 청춘들은 그곳에서 배를 타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히말라야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자리에서 그렇게 세상을 품고 있었다. 삶의 배경으로 펼쳐지는 히말라야는 변함없이 고요해 보이지만 실재의 히말라야는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이토록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산을 오르려는 이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그 꼭대기에 마침내 오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산에 영원히 묻히기도 한다.
영화 <히말라야>는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함께 등정하다 죽은 후배의 시신을 찾기 위해 ‘휴먼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다시 그 험준한 산에 오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실화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정우는 <히말라야>에서 엄홍길 대장이 찾아 나선 후배, 박무택 대원을 연기했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는 단번에 끝까지 다 읽었을만큼 재미있었어요. 제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인데도 그 상황과 박무택 대원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졌죠. 인물들이 웃을 때는 같이 웃고, 울 때는 같이 울게 되더라고요. 촬영이 얼만큼 힘들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와, 그런데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웃음) 현장에서 신나게 연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 무대에 가기까지가 쉽지 않았죠. 일단 복장을 갖추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고글까지 낀 채 촬영장까지 다시 한참을 걸어가야 해요. 경비행기를 타고 헬기도 타고, 육체적으로 쉽지 않은 현장이었죠. 어떤 느낌이냐 하면, 헬멧 없이 하늘에서 스쿠터 타는 느낌?(웃음) 그래도 덕분에 태어나서 가장 높은 곳에 서봤어요.”
산에 묻힌 박무택 대원과 그의 시신을 찾겠노라고 다시 산에 오른 엄홍길 대장에게 히말라야는 그들 생애 가장 큰 도전이었을 터다. 그리고 정우에게는 연기를 시작한 것 자체가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어 달쯤 지났을 때 어머니가 저를 서울로 보내주셨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 올라와 하숙을 하며 연기를 시작했죠.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제가 배우의 길을 가는 데 가장 큰 은인인 셈이죠. 어머니가 결단을 내려주지 않았더라면 저도 서울에 올라올 용기를 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연기를 시작하고 그의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오디션이다. 부지런히 오디션을 봤고, 그 덕에 1년에 세 작품씩은 꾸준히 했다. 그중에는 배우로서 꿈을 이루기 위해 오디션을 본 작품도 있고, 또 어떤 작품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것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계속 소모되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어요. 소모되기보다는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늘 같은 역할, 같은 연기 톤이 아니라 당장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더라도 배우로서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었죠.”
그러니까,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끝나고 단 두 편의 영화에만 출연한 건 온전히 그의 선택이다.
“막 서른이 되었을 무렵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작품과 저를 원하는 작품 간의 온도 차이 때문에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죠. 아마 연기를 시작하고 가장 힘든 때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응답하라 1994>를 만났고, 그 이후에는 ‘쓰레기’와 닮은 캐릭터가 많이 들어왔어요. 많은 작품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쉽게 고를 수가 없었죠. 그중에는 저로서는 소화할 능력이 없는 듯한 작품도 있었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누구나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인데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은 거. 맛있게 잘 먹을 수 있는, 그래서 제 연기가 덜 어색할 만한 작품을 골랐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영화 <바람>의 주인공을 맡으며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받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응답하라 1994>로 뜨거운 인기를 얻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빨리 잘 풀린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 제 얼굴에 이렇게 빨리 뜰 줄 누가 알았겠어요.(웃음) 아직도 오늘처럼 화보 촬영을 하는 날이면 간질간질해요. 그냥 꾹 참고 ‘나는 멋진 배우야’ 하고 스스로 최면을 걸며 카메라 앞에 서는 거죠. 지금도 충분히 저로선 과분하게 사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바람>과 <응답하라 1994> 때문에 잘됐다고 말하진 못하겠어요. 대사 한 마디 없는 단역부터 시작해 수많은 역할이 제 배우 인생을 채운 거죠.”
물론 절망적인 시간도 있었다. 그때마다 가장 힘이 된 건 아버지와 어머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그 슬픔이 오히려 깊지 않았어요. 부산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늘 바쁘셨거든요. 항상 밖에서 일을 하던 분이었으니 돌아가신 후에도 매일 밤 그 빈자리 때문에 슬프진 않았어요. 그런데 힘들거나 기쁠 때마다 아버지가 생각나더라고요. 절망적일 때면 더욱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그러곤 힘을 얻었던 것 같아요. 물론 어머니 생각도 많이 했죠. 오랜 시간 무명 배우로 지내며 생활은 해야 하는데 돈은 없고, 저 때문에 집안이 자꾸 기울어갔어요. 어머니는 ‘이게 뭐 하는 거냐’며 제 등짝 한번 때릴 만도 한데 늘 묵묵히 응원해주셨죠.”
부산에서 가장 일찍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을 닫았던 아버지의 서점은 어머니가 이어받아 10년 넘게 꾸려오다 몇 년 전에 문을 닫았다.
“아들 잘되고 서점을 닫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웃음)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서점에서 책을 많이 사지 않으니까 닫은 거예요. 어머니 몸만 축나고 해서. 어머닌 이제야 좀 편히 쉬며 살고 계세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길을 포기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배우가 될 거라고 단언하는 그지만 정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기가 아닌 가족이다. 가족, 가정의 행복 뭐 그런 것들. 고향에 내려가는 날이면 온 가족이 다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이 가장 소중한 남자다.
“아버지가 운전면허가 없었어요. 모두 다섯 식구였는데 어릴 때는 제가 아버지나 어머니 무릎에 앉으면 온 가족이 택시 한 대로 움직일 수 있었죠. 그런데 크고 나니까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두 대에 나눠 타자니 돈이 아깝고. 자연스레 온 가족이 어디 다니는 일이 없어졌어요. 언제부턴가 어머니, 아버지, 형, 누나와 다 함께 보낸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게 참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라도 제가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다 같이 외식을 하는 거예요. 저 경상도 남자잖아요. 사실 가족과 그렇게 살갑게 이야기 나누는 게 간지럽기도 해요. 그래도 노력하는 중이에요.(웃음)”
인터뷰를 한 지 며칠 뒤 그가 <꽃보다 청춘> 촬영을 위해 아이슬란드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행하며 얻는 에너지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 다음 발걸음을 위한 에너지를 충분히 채워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느리게 자신만의 신념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에게 던졌던 마지막 질문이 생각났다. 2016년은 어떤 한 해가되었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전 이런 질문에 진짜 약해요. 내년에 이루고 싶은 건 없어요.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해요. 제 나이에 맞게 물 흘러가듯이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