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것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세상에는 드러난 일보다 드러나지 않은 채 꽁꽁 숨겨진 일들이, 혹은 누군가 일부러 숨기는 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들꽃>에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거리 위의 아이들이 나온다. 갈 곳이 없는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건 어른들의 관심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는 어른들의 더러운 마음이다. 세상의 바람과 비를 오롯이 혼자 몸으로 맞아야 하는 이 들꽃 같은 아이들은 싸우고 발버둥 치며 자신들의 힘으로 버티기 위해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간다. <후아유-학교 2015>(이하 <후아유>)에서 악역을 실감나게 연기하며 온갖 미움을 산 조수향은 <들꽃>에서 ‘수향’으로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그녀가 상을 받은 지 1년이 지나서야 개봉한 이 작은 영화에는 우리가 외면해온 거리 위의 아이들이 담겨 있다.
수향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악다구니를 쓰며 등장한다. 어른에게 욕하고 싸우고 몸부림치는 수향을 연기하기가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찍는 동안에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집을 나온 세 아이 모두 거친 환경에 버려졌지만 정작 현장의 우리는 즐거웠다. 혼자였더라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래 여배우 세 명이 함께했기에 전우애 같은 게 있었고,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 모두 가족같이 지냈다. 힘든 기억보다는 재미있는 기억이 더 많은 현장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관은 촬영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묵은 숙소이기도 하다. 자고 일어나면 바퀴벌레가 보이던 곳이었다.(웃음) 그런데 환경이 열악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촬영하는 내내 늘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모든 게 편하고 익숙했다. 흙이 묻은 채 잠들고 다시 일어나 촬영하는 생활, 그렇게 ‘들꽃’처럼 지내며 연기했다.
<들꽃>의 수향을 어떤 인물로 이해했나? 어쩌면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수향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연을 밝게 포장하려는 아이다. 친구끼리 있을 때는 듬직한 기둥이 되어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기려 든다. 수향을 연기할 때 그 점 때문에 쉽지 않았다. 아픔과 사연을 꺼내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로에서 연극 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연출하는 작품에 객원 배우로 들어가게 되었다. 졸업하고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고 배우겠다는 생각에 선뜻 나섰다. 그런데 학교에서 연극을 할 때와 차이가 많았다. 학교에서는 늘 나를 기다리는 무대가 있고 가족과 지인, 선후배들이 객석을 채워주었다. 그런데 대학로의 무대는 달랐다. 아주 작은 소극장에서 관객 한두 명을 앞에 두고 연기하는 날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아 차비가 없는 날도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도 공연에 대한 목마름은 있다. 매일 아침 극단 단원들이 모두 함께 남산에 올라 몸을 푼 뒤 훈련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며 체력을 키우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역할을 두고 동료끼리 싸우기도 하고 함께 장면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울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서로 안아주며 지낸 나날이었다. 그렇게 대학로에서 두 번째 작품을 하던 무렵 <들꽃> 오디션을 봤다.
사실 <들꽃>은 <후아유>보다 먼저 찍은 작품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당신을 <후아유>의 악역으로 기억한다. <들꽃>을 찍고 <눈길>이라는 독립영화를 한 편 더 찍었다. 그 뒤에 <후아유>라는 작품을 만났다. 그 전까지는 내가 공중파 드라마에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다 독립영화에 연이어 출연하다 보니 드라마는 왠지 나와 다른 세계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캐스팅 제안을 받고도 선뜻 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자꾸만 내가 이걸 해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게 친한 사람끼리 작은 영화를 찍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 좋은 기회라며 다독여주지 않았다면 끝까지 출연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필모그래피가 길지 않지만 많은 작품에서 늘 복잡한 사연과 감정을 가진 인물을 연기해왔다. 이제 좀 다른 색깔의 캐릭터에 도전하고픈 욕심이 생기지는 않나? 운이 좋아서 한꺼번에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가진 색깔 중 하나를 딱 꺼냈을 때 사람들이 그 점을 잘 봐주고 동감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꺼내 보이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꺼내 보인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졌으면 좋겠다.
거칠지 않고 예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 오늘처럼 이렇게 꾸미고 사진을 찍을 때면 무척 쑥스럽다. 안 그런 척 촬영하긴 했지만 왠지 오글거리는 느낌이다.(웃음) 언젠가 이렇게 여성스러운 모습이 익숙해질 때가 오지 않을까? 언제까지나 <들꽃>의 수향으로 남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들꽃>은 배우 조수향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까? 나도 한때 들꽃 같은 아이였던 것 같다. 대학로에서 연기하며 힘들었던 시절, 그럼에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고 들꽃처럼 지지 않고 버텨냈다. 그 시절 만난 <들꽃>이라는 작품을 위해 불꽃을 본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연기했다. <들꽃>은 내게 그렇게 모든 게 다 불타고 재만 남을 정도로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빈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