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라 의 나날들
강소라 가 드라마 <맨도롱 또똣>의 여주인공 ‘이정주’를 연기한 지 훌쩍 일곱 달이 지났다. 지난 봄과 여름 종일 드라마의 배경이 된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SNS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촬영장의 그녀는 퍽 즐거워 보였다. 그이전 드라마에서는 줄곧 치열하게 살아가는 도시 여자였던 그녀가, 그보다 두 박자 정도는 느린 제주도민의 일상을 연기하는 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시종일관 따스한 기운을 주던 드라마를 마친 후, 강소라 는 문득 그동안의 일상과는 다른 일상을 살아보기로 한다. 무작정 쉬고, 무작정 떠나기로 한 거다.
“지금까지 한 작품 끝내고 다음 작품까지 석 달 이상 걸린 적이 없었어요. 그 석 달 동안에도 광고나 화보 촬영을 계속했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제 안에서 바닥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꾸 꺼내서 보여주기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결단을 내렸어요. <맨도롱 또똣>이 끝나자마자 상하이에 짧은 일정으로 다녀온 후에, 지난해 9월에 처음으로 2주 넘게 여행을 가봤어요. 런던에서 일주일, 파리에서 일주일 이렇게요.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요. 여행은 이제 언제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비행기 타는 것도 정말 좋아요. 어떤 사람들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 싫다고 하는데, 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없는 비행 시간이 참 좋더라고요.”
그 후로 다시 짧은 국내 여행과 일본 료칸 주말 여행까지 섭렵한 후에야 그녀의 방랑기는 막을 내렸다. 그동안 셀피 실력이 부쩍 늘었고(강소라 는 한동안 인터넷에서 ‘사진을 그렇게 찍을 거면 그 얼굴은 나를 달라’는 네티즌의 아우성이 자자할 정도로 셀피에 젬병이었다), 일주일에 다섯 번씩 친구들과 만나면서 인맥도 넓어졌다. 연말에 열린 연기대상 시상식에서는 우수연기상도 받았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는 수상 소감은 꼭 그녀의 지난 휴식기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쉼 없이 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달콤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공백기다운 공백기를 보낸 강소라 는 3월에 방송을 시작하는 <동네변호사 조들호>로 안방극장에 돌아온다. 박신양이 맡은 민생 변호사 ‘조들호’를 도우며 그와 일하면서 진정한 법조인으로서 자아를 찾아가는 ‘이은조’ 역할이다. 명문대에 간신히 턱걸이로 입학하고, 사법연수원에서도 꼴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용의 꼬리’ 같은 이은조는 뭐든지 척척박사이던 <미생>의 ‘안영이’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이제 막 촬영이 시작되는 단계라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쩐지 당찬 구석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은 강소라 가 이제껏 연기했던 역할들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점이다. 우리가 아는 배우 강소라 는 그렇다. 그녀를 세상에 알린 영화 <써니>의 골목대장 ‘하춘화’였을 때부터, <못난이 주의보>의 차도녀 ‘나도희’와 <닥터 이방인>의 냉철한 의사 ‘오수현’을 거쳐 <미생>의 에이스 신입사원 ‘안영이’와 <맨도롱 또똣>의 부지런하고 거침없는 ‘이정주’에 이르기까지 성격도 직업도 달랐지만 언제나 화면 속 강소라는 강단 있고 솔직한 여자였다.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곧 그의 목소리다. 어떤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다. 매번 다른 캐릭터에 도전하며 자신의 재능을 시험하고 여러 모습을 보여주려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많은 작품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하나의 줄기를 이루며 또렷한 배우도 있다. 강소라 는 후자, 그러니까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 중 하나다.
“일단 저 자신이 그런 여성상을 좋아해요. 사실 전 <써니>의 하춘화 같은 리더 기질은 전혀 없거든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 제 성격도 작품 속 인물을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여전히 가지고 있죠. 무엇보다 그런 당당한 여성상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수동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건 아직은 엄두가 안 나기도 하고요. 성격 급한 저로서는 아마 마인드 컨트롤을 엄청 해야 할 테죠. 물론 그런 역할 또한 도전해봄 직하지만,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어 침착해지고 내공이 쌓였을 때 가능할 것 같아요.”
꾸무럭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게 도통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일상의 강소라 는 쉬는 동안에도 무던히 바빴다. 한강변에 산책을 나가는가 하면 영화와 공연, 전시회도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칼로리가 폭발할 듯한 먹방 또한 그녀의 SNS에 줄을 이었다. 몸매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여배우의 인스타그램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군침 도는 사진들이다.
“맛집 포스팅이요? 그것도 많이 자제한 거예요.(웃음) 촬영이 없을 때는 운동할 시간이 많이 나니까 먹고 더 열심히 달려요. 제가 하루에 딱 한 끼만 챙겨 먹거든요. 그래서 더 맛있는 걸 찾아다녔죠. 제가 여러모로 성격이 좀 계획적인 편이에요. 항상 다음 주 스케줄을 미리 짜놓고, 약속은 번개보다는 선약을 좋아해요. 메뉴도 ‘아무거나’를 못 참아요. 모임을 주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건 아니지만 ‘우리 식당 예약했나? 그냥 내가 할까? 나한테 넘겨’ 이런 식이죠.”
털털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격의 없이 대할 것 같은 그녀지만, 마냥 남들처럼 평범하긴 어려운 유명인이 되었다는 자각 또한 있다. 내가 남들을 보는 시선은 여전한데, 남들은 나를 확연히 다른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는 건 좀체 익숙해지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녀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이번에 쉬면서 친구들을 일주일에 다섯 번씩 만나고 그랬어요. 친구의 친구와도 어울리고, 인맥이 많이 넓어졌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예전보다 경계심이 좀 없어진 것 같아요. 처음에 대중이 저를 알아봐주기 시작하면서는 자신을 노출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컸거든요. 어릴 때라 스스로를 통제하기도 힘들었고요. 이제는 좀 ‘리스크 관리’에 능해졌나, 싶기도 해요.(웃음)”
겉으로 견고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껍질 안쪽이 연약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특히 연애는 사람을 연약하게 만든다. 내색하지 않고 잘 참는 법을 일찍 터득한 그녀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큼은 그러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또한 지난 연애는 자신을 성장하게 했다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만큼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사귀는 사람 말고는 없다시피 하잖아요. 절친한 친구나 부모님과도 그러지는 않으니까요. 그렇게 저를 몰두하게 만들고 제 머릿속에 하루 종일 생각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상대에 따라 없던 취미가 생기기도 하고, 관심사가 변하기도 하고요. 좋은 방향이건 나쁜 방향이건 그렇게까지 타인에게 깊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축복인 것 같아요. 전 제가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의지하고 기대는 걸 싫어했고요. 제 안 좋은 면을 드러내는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연애 경험이 생기면서는 상대에게, 남들에게 민낯을 드러내는 법도 알게 되었어요. 꾸미지 않은 저 자신도 그것대로 좋더라고요.”
2월생인 그녀는 이제 막 만 스물여섯이 되었다. 찬란한 청춘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에겐 어떤 목표가 있을까? “예전에는 제가 그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완성하려는 목표에 매달렸어요. 근데 살아보니 생각한다고 그대로 다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웃음) 어느새 저 자신을 너무 엄격하게 몰아 붙이고 있었어요. 솔직히 저도 저를 잘 모르겠어요. 특히 배우로서는, 베테랑도 아마추어도 아닌 조금 모호한 지점에 와 있는 느낌이 들어요. 주변 선배님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제 연차 때쯤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큰 틀과 방향성은 정하되, 나머지는 경험에 맡기려고 해요. 더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싶어요. 좋은 선생님, 좋은 배우와 함께 작업해보고 싶고, 좋은 사랑도 하고 싶고요. 물론 후회하는 과거도 있지만 행여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시행착오를 겪기 싫어서 안전한 것만 할 테고, 그런 식으로 지금의 저를 잃고 싶지는 않거든요. 버티고, 알아가려고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깊이 생각하고 마음껏 누리며 충전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온 강소라 는, 다시 달릴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