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담은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지난해 <검은 사제들>에서 악령이 깃든 여고생을 연기하며 충무로의 가장 뜨거운 라이징 스타로서 한 해를 보낸 그녀는 요즘 연극 <렛미인>의 ‘일라이’를 연기하고 있고, 연습과 공연이 없는 날에는 사전 제작 드라마인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를 촬영하는 중이다. 그녀는 늘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검은 사제들>의 ‘영신’으로 그 존재를 알아채기 전부터 그녀는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고, 스무 편에 가까운 단편영화와 몇 편의 연극 무대에 올랐으며,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표정 없는 소녀와 <베테랑>에서 수모를 겪던 신인 여배우, <사도>에서 회초리로 맞던 후궁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고된 스케줄이 힘들었는지 아기 때 이후론 처음으로 열이 39.5°C까지 오르는 독감에 걸렸다는 그녀가 말했다. “아직 지치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저더러 ‘독한 년’이라며, 좀 쉬어 가라고 하지만 여전히 연기하는 순간이 너무 재미있어요.”
연극과 드라마 촬영을 동시에 하고 있으니 지칠 법도 하겠다. 아직 지치진 않았다.(웃음) 그런데 지난주 독감에 걸려서 아기 때 이후 처음으로 열이 39.5°C까지 올랐다.
왜 연극 <렛미인>을 차기작으로 선택한 건가? 안전한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연기를 처음 배운 곳도, 연기를 시작한 곳도 연극 무대다. <검은 사제들>을 끝내고 영신이에 대한 많은 관심과 좋은 반응 덕에 다음엔 뭘 보여드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렛미인> 오리지널 연출 팀이 한국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오디션을 보기로 했다. <렛미인>은 동작이 많은 공연이라서 오디션 때 1시간 40분 동안 ‘움직임 워크숍’을 했는데 그때 ‘아, 내가 이런 느낌 때문에 연극을 해왔고 연기를 좋아했었지’ 하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다행히 운 좋게 오디션에 합격했다.
어떤 매력 때문에 다시 무대를 찾게 된 걸까?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은 관객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거다. 연기를 하면서 바로 관객의 반응을 느낄 수 있고 그 반응에 따라 내가 다시 연기로 반응하고 하면서 순발력을 기를 수 있다. 배우가 가져야 할 목소리나 신체를 위한 훈련도 영화나 드라마를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좋은 공부가 된다. 또 하나의 작품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도 길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번 커튼 콜을 할 때마다 울컥하는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렛미인>도 그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어 도전하게 된 것 같다.
처음 연기를 시작하고 연극 무대에 올랐을 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이 똑같나?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처음 연극 무대에 오른 게 스물한 살 때였는데 그때는 정말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책임감이란 게 생겼다. 나만 즐겁다고 되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연기로 충분히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에게 안긴 첫인상이 강렬했다. <검은 사제들>에서는 악령에 씌인 여고생이었고, <렛미인>에서는 드라큘라가 되었다. 둘 다 우리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닌 셈이다. 성격이 조용하고 우울한 편이었다면 오히려 그런 연기를 못 했을 거다.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님도 무거운 역할을 연기해도 금세 그 역할에서 빠져나올 만큼 긍정의 기운을 가진 배우를 찾고 있었다. 영신이란 인물은 분명 무서운 캐릭터이긴 하지만, 오케이 컷 소리가 나면 웃으면서 ‘감독님, 저 괜찮았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배우 말이다. 오히려 평상시에 잘 접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보니 연기하는 내내 재미있었다.
오해했다. 조금 무겁고 우울한 면을 가진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런 거 되게 싫어한다.(웃음) 혼자 있는 것보다는 사람들 만나는 걸 더 좋아한다. 우울한 날에 집에 혼자 있으면 괜히 더 외로워지는 것 같아 공연도 많이 보러다니고, 친구도 일부러 많이 만난다.
연기는 왜 시작하게 되었나?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진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뮤지컬 <그리스>를 본 후였다. 무대 위 배우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저들처럼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무작정 시작했다. 연기에 대한 매력보다는 무대 위 배우들의 모습에 빠진 거다. 좋아하는 일을 저토록 즐기며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연기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부모님은 응원해주었나? 전혀.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그런 피는 흐르지 않는다고 말리셨고, 아버지의 반대는 더 심했다. 아버지는 배우를 ‘노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결혼 기념일에 영화 티켓을 선물해도 극장에 가지 않고, TV는 뉴스 채널과 디스커버리 채널, 딱 두 개만 보는 분이었다.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 수시에 영화 관련 학과에 다섯 군데 넣었는데 모두 떨어졌다. 아버지가 호적에서 날 파버릴 것만 같았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고집부린 건데 생각만큼 잘 안 풀리니까 힘들었다. 그맘때쯤 본 영화가 <블랙>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펑펑 울었다. ‘이렇게 가진 게 많은데 뭐가 힘들다고 불평하고 우는 거야. 빨리 가서 연습이나 해’ 하고 스스로를 채근했다. 지금은 아버지도 내 일을 좋아해주신다. 내가 출연한 <라디오스타>를 한 열 번은 보신 것 같다. 새벽 6시면 일어나 출근하시는 분인데 새벽 2시에 재방송 한다며 나와서 같이 보자고 하실 정도다.(웃음)
이제 막 배우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지금의 내 얼굴과 목소리로 할 수 있는 역할은 정해져 있고 나이가 들어 30대, 40대가 되어 할 수 있는 역할과 작품이 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게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인 것 같다. 나이가 들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지, 어서 빨리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껏 참 부지런히 20대를 살아가고 있다. 학교도 쉬지 않고 4년을 쭉 다녔다. 그간 연극도 4편 했고 16편의 단편영화도 찍었다. 남들이 보기에 미련하리만큼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유는 하나, 재미있어서다. 다들 왜 쉬지 않느냐고 물을 때마다 쉬면서 하는 거라도 답했다. 힘들고 지치면 분명 쉬어갔겠지만 그저 재미있어서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혼자 여행 한번 해보지 못했다는 거다. 시간도 없었지만 사실 혼자 어디엔가 가는게 두려웠다. 올해는 꼭 혼자 아주 짧게라도 여행을 가고 싶다. 6년을 달려 왔으니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아주 살짝 리셋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혼자 여기저기 부딪히며 지내보고 싶다.
연기 말고 다른 데 열정을 쏟아부은 적이 있나?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가장 열정을 쏟아부은 거라면 노래방?(웃음) 아, 재작년에 수상스키를 처음 접하면서 아주 신났었다. 처음에는 무언가에 매달려 끌려간다는 게 엄청 싫었는데 막상 해보니 마치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작년에 너무 바빠서 한 번도 못 탔다. 올해는 꼭 타야지.
영화와 달리 드라마 속 박소담은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드라마 <처음이라서>는 <검은 사제들> 촬영을 마치고 오디션을 봐서 하게 된 작품이다. 밝은 본연의 내 모습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이라서> 촬영하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이번엔 진짜 인간을 연기하는 구나’ 이런 느낌. 좀 더 박소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겠다. <렛미인>도 그렇고 <검은 사제들> <베테랑> <사도> 모두 오디션을 거쳐 하게 된 거다.
합격의 기술을 책으로 써도 되겠다. 안 된다. 떨어진 오디션이 더 많다.(웃음) 내 나이에 응시할 수 있는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전부 다 본 것 같다. 한 달 동안 열아홉 번 오디션을 보고 모두 떨어진 적도 있다. 오디션이라는 게 끝나고 나면 무척 허무하다. 이렇게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하며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3분, 5분 동안 오로지 연기로만 나를 표현해야 한다. 오디션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오면 그동안 준비해온 과정이 머리를 스치면서 눈물이 엄청 난다.
올봄 가장 기대되는 건 뭔가? 아마 3월 내내 드라마를 촬영하게 될 것 같다. 그래도 4월 말쯤에는 끝날 테니까, 그때는 진짜 짧게라도 여행을 다녀올 거다. 여행 가서 특별한 걸 해보고 싶다기보다는 어딘가에 가고 싶다.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가 될까? 매년 왔으면 좋겠다. 한 번 오고 끝나면 슬프지 않나. 그렇게 매년 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올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해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