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주인이고 넌 사냥개야.’ 드라마 <뱀파이어 탐정>의 악녀 ‘요나’의 대사다. 늘 현실의 인물로 머물러왔던 이청아가 판타지 세상에서 뱀파이어 요나를 연기한다.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는 그녀의 속도는 요즘 무서울 정도로 거침이 없다. 작품이 한 편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작품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 싶으면 예능 프로그램의 MC로 TV에 모습을 보인다. 배우의 세계에 발을 막 내디뎠을 때는 연기도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외모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행사장에 모습을 보일 때마다 옷과 신발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정도다. 안 해보고 후회하기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며 살기로 마음먹은 이청아가 그렇게 변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뱀파이어가 되었어요. 거칠 게 없는, 요즘 말로 ‘쎈캐’예요. 판타지 장르를 좋아해요. 미드 중에서도 <히어로즈> 같은 작품 좋아하거든요. 늘 ‘슈퍼 능력자’가 되어보고 싶었어요. 예전에 출연한 옴니버스영화 <썬데이 서울>에서 연기한 쿵후 소녀 말고는 지금껏 연기했던 캐릭터 대부분이 현실에 닿아 있는 인물이었죠. 비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에요. ‘어느 정도까지 표현이 가능할까’와 ‘꼭 사람처럼 보일 필요는 없는 자유로움’ 사이를 오가며 연기했어요.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들이 대부분 정직하고 바른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뱀파이어 탐정>의 요나는 사람들을 처단하는 데 거침이 없는 악인이죠. 과거에는 제가 생각하는 윤리의 기준과 캐릭터의 기준이 일치했다면 이제는 해본 적 없는 생각을 캐릭터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는 점도 재미있어요. 그리고 요나라는 캐릭터는 시적이기도 해요. 주변 인물들이 ‘요나’에 대해 ‘공포의 근원’이나 ‘악의 근원’처럼 시적으로 표현하거든요. 어쨌거나 뱀파이어 악녀는 저에게 여러모로 도전인 캐릭터예요.
배우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청아는 과감하기보다는 조심스러운 사람일 것 같아요. 돌다리를 두드려보기만 할 뿐 건너지 않는 성격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두드리면서 건너보기로 맘을 바꿨어요. 물론 여전히 과감하진 않아요. <뱀파이어 탐정>을 시작할 때도 걱정이 많았죠. 그런데 사실 이런 비현실적인 인물을 갑자기 연기하게 된 건 아니에요. 대학교에 다닐 때는 희극보다 비극이 더 편했고 지난해 촬영한 <해빙>에서도 미스터리한 캐릭터를 맡았죠. ‘뱀파이어’가 되기까지 단계가 있었던 셈이에요.
오래전 <동갑내기 과외하기 2>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하려고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 20대였으니 시간도 많이 흘렀고, 그만큼 당신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겠죠. 많이 변했어요. 좀 더 생각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20대에는 고민하느라 지레 겁먹는 일이 많았죠. 배우로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기보다는 인생을 대하는 제 태도가 변했어요. 재작년에 엄마가 많이 아프다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제 곁을 떠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생이란 게 결국 해보고 후회하거나 안 해보고 후회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요. 그 후부터는 마음이 조금만 동하면 해보자는 식으로 작품을 선택하다 보니 올해 벌써 세 작품을 하게 됐어요. 지금은 <운빨로맨스> 촬영에 들어갔어요. <운빨로맨스>에서는 ‘알파걸’을 연기해요.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게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해온 작품과 비교하면 ‘신분 상승’을 이뤘다고 해야 할까요?(웃음)
취향도 변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머리도 훨씬 짧았으니까요. 그때는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연기도 제대로 못하는데 외모를 신경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외모도 배우에게 분명 중요한 부분이더라고요. 캐릭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나에게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좋은 스태프들과 일하며 배워갔어요. 예쁘게 메이크업하고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찾다 보니 꾸미는 데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꽃미남 라면가게>라는 작품을 할 때 제 스태프들이 무조건 숍에서 더 오래 있다가 가라고 했어요. 전에는 정말 후딱 끝내고 나와버렸거든요. 저를 위해 스태프들이 이렇게 욕심을 내주는데 정작 제 자신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30대가 되고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20대에는 경험하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었죠. 온통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고 그 일들에 적응하며 반응하기에도 바빴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 길을 선택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겠구나’라는 식으로 예측할 수 있어요. 어릴 때는 각오할 새도 없이 겪어내기에 바빴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각오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선택을 받아들이죠.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고 싶어요? 영역을 넓히고 싶어요. 배우로서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 목표예요. 그런 이유로 예능 프로그램 MC도 해본 거고요. 전에는 못 할 것 같은 일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해보려고요. 제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머리가 새하얘지거든요. 초등학생일 때 하루는 연구 수업을 한 적이 있어요. 교실 뒤쪽에 학부모들과 교감 선생님, 장학사 들이 쭉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발표를 해야 했는데 너무 무서워서 수업 중간에 화장실로 도망가버렸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성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웃음) 그랬던 제가 MC라는 역할에 도전해본 거죠. 올해가 끝날 즈음에는 연극 무대에 오르고 싶은 소망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