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혜 롱 베스트와 블라우스, 팬츠 모두 에르마노 설비노(Ermanno Scervino), 이어링 넘버링(Numbering), 슈즈 쌀롱드쥬(Salondeju). 임세미 스팽글 장식 톱과 와이드 팬츠 모두 서리얼벗나이스(Surreal but Nice),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청아 재킷 띠어리(Theory), 스커트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 진주 뱅글 넘버링(Numbering),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윤지혜 롱 베스트와 블라우스, 팬츠 모두 에르마노 설비노(Ermanno Scervino), 이어링 넘버링(Numbering), 슈즈 쌀롱드쥬(Salondeju).
임세미 스팽글 장식 톱과 와이드 팬츠 모두 서리얼벗나이스(Surreal but Nice),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청아 재킷 띠어리(Theory), 스커트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 진주 뱅글 넘버링(Numbering),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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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니에 문신, 표독스럽다기보다는 서슬 퍼런 표정의 여자가 곰방대를 태우다 말고 가래침을 대차게 뱉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비도 잡아먹은 나여. 피 한 방울 안 섞인 오라버니 목숨 하나 못 끊겄소.’ 드라마 <대박>에서 윤지혜는 투전방 ‘설주’를 연기한다. 오롯이 자기 힘으로 남자들을 밟고 올라 우두머리가 된 여자다. 냉정하고 도도하며, 뜨거움보다는 차가움을 연기해온 윤지혜에게 설주는 반전이자 도전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가체를 쓰고 연기하는 탓에 요즘은 머리카락도 스스로 뚝딱 자른다는 그녀는 자신을 재료 삼아 작품이라는 그림을 그려나가는 중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윤지혜는 차갑고 도시적인 여자였어요. 그런데 <대박>은 사극이고, 극 중에서 금니까지 끼고 등장해요. 처음 작품에 들어갈 때부터 캐릭터를 세게 잡았어요. 극이 진행되면서 초반의 무거운 캐릭터가 부드러워지긴 했는데 기존의 사극에서는 보기 힘든 캐릭터다 보니 저에게는 도전이었죠.

배우라는 직업은 여전히 즐거운가요? 여배우라고 특별히 의식하며 살지 않아요.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죠. 이 직업이 좋아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작품을 위해 나 자신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이에요. 스스로 재료가 되어 뭔가를 만들어나갈 수 있잖아요. 저는 제가 누군가의 워너비가 되는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지금껏 살아오며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품고 있는 저를 재료 삼아 작품을 그리는 일을 하는 사람일 뿐이죠.

연기를 시작했을 때와 지금, 배우로서의 고민도 달라졌겠죠? 20대랑 비교해서 제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전보다 훨씬 편해졌다는 사실이에요. 어릴 때는 이상하게 불편한 점이 많았어요. 제 스스로 틀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 이건 안 되고, 저건 되고 이런 식으로요. 그때와 비교하면 훨씬 유연해졌죠. 지금은 현장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처음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감독과 작가, 현장의 여러 스태프들이 저 대신 잘 해내주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부담감도 훨씬 덜하고 그만큼 덜 예민해요. 성향이 변했다기보다는 이제 좀 더 폭넓게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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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숄더 점프수트 에스카다(Escada), 네크리스와 이어링 모두 코스(COS),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가 되고 지금껏 포기하지 않은 신념이 있나요? 물론 있죠. 그런데 배우가 신념을 지키기란 쉽지 않아요. 하나의 작품이 나 혼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처음엔 배우라면 작품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배우의 지나친 신념이 조금 위험한 고집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모든 작품이 제 뜻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 뜻이 정답이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캐릭터를 해석할 때 내가 바라보는 시선과 다른 사람의 시선이 다르거나 마음에 내키지 않는데 마음에 드는 척하는 것이 힘들고 불편했어요. 지금은 신념이 무너졌다기보다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직업을 오랫동안 지켜오기란 쉽지 않아요. 특히 여배우를 위한 작품이 많지 않은 한국에서 연기를 포기하지 않고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배우라는 직업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던 때가 있었어요. 그 시간들을 그냥 버텨냈어요. 간신히 연명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이겨내려 하지 않고 그저 내버려뒀어요. 그러고 나니 시간이 흘러가 있더라고요.

그때 이 길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다른 길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이제 와서 뭔가를 새롭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잔뜩 웅크리고만 있었으니까요. 그런 시간은 불현듯 찾아오더라고요. 뭘 해도 안 되던 때였죠. 작품을 위한 미팅도 잘 풀리지 않고 캐스팅된 작품의 제작 자체가 무산되기도 하고. 나중에는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잊을 정도였어요. 그런데도 배우의 일을 포기하지 않은 건 아버지 덕분이에요.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겠느냐며 저를 단단히 잡아주셨죠.

배우로서 화양연화를 맞이한 것 같나요? 아니면 아직 찾아오지 않았나요?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할래요. 인생을 통틀어 원하는 작품과 캐릭터를 만날 기회는 한두 번밖에 오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죠. 하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많아요. 스릴러를 좋아해서 심리적으로 막 쪼이는 작품도 해보고 싶고 성장영화도 욕심나요. 그러고 보니 대중적인 취향은 아닌 것 같네요.(웃음) 부지런히 일하다 보면 필모그래피도 꽉 채워질 테고 꿈꿨던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믿어요. 해보지 않은 것들이 욕심나요.

<대박>이 벌써 절반을 지났어요. 촬영이 끝나면 뭘 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인가요? 여행도 가고 떡볶이도 먹으러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그동안 보지 못한 영화도 보고 그렇게 지내겠죠? 집 뒤에 있는 북한산에 가서 운동도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