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희의 이력서에는 ‘굴욕’이 없다. 2008년 <사람을 찾습니다>와 <반두비> 등 작품성으로 주목받은 독립영화에서 모습을 보인 이후 드라마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과 <금 나와라 뚝딱!> <기황후> <내 딸, 금사월>에 출연하며 기대 시청률을 넘어서는, 소위 ‘중타’ 이상을 해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출연한 <내 딸, 금사월>의 최고 시청률은 31.7%. 올해 상반기에 시청률 30%를 넘어선 드라마가 단 두 편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축해도 좋을 만한 성취다.
대중이 고루 사랑하는 작품에 출연했다는 것, 그래서 굴욕이 없다는 사실은 언뜻 ‘안전 제일형’ 배우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배우 캐스팅, 그 한 끗에 작품이 죽고 산 무수한 사례를 곱씹어보면 신뢰받는 안정적인 배우라는 타이틀은 배우 백진희가 지닌 강점임이 분명하다. 인터뷰 중간중간 변화의 필요를 느끼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대로 좋다’고 답했다. 다만 ‘지금의 자리에서 더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매 순간 탈을 바꿔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한 배우의 세계에서 조급함에 잠식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는 변화만큼이나 큰 담대함이 필요하다. 변화를 다그치기보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성실한 방법으로 해내는 것 역시 변화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일 테니까.
데뷔 이래 가장 긴 휴식을 만끽하고 있죠? 네. 8개월 정도 됐어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가족, 친구들과 여행을 다녀왔어요. 보라카이에 가서 처음으로 스노클링도 했어요. 물을 무서워해서 시도도 못 했었는데, 막상 하니 되게 재미있더라고요.
음···, 스노클링이 인상 깊은 기억이라고요? 재미없죠?(웃음) 소소한 재미가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게 타인에게는 심심하게 비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되레 작은 것에 자극을 받는 사람인 것 같아요. 최근에는 동생이랑 쉐이크쉑 버거를 한참을 줄 서서 먹었거든요. 얼마나 맛있길래 이렇게 줄을 서나 하면서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되게 신나더라고요. 매장 안에도 사람이 많아서 테이블을 차지하기 위한 눈치 싸움이 치열해요. 이런 작은 경험들이 다 재미있어요.
소소한 즐거움 중 가장 큰 것이 해외 봉사활동이고요? 네. 국제 아동 후원 기구 ‘플랜코리아’와 같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올해는 <내 딸, 금사월>을 끝내고 캄보디아에 갔었고, 작년에도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태국을 다녀왔어요. 해외 봉사활동은 대학생 때부터 하고 싶었는데 경쟁률이 높아서 여러 번 지원했지만 탈락했었거든요. 지금은 작품 사이에 틈날 때마다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계속 가게 되는 이유가 있어요? 처음에는 사명감이 앞서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많이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학용품이나 옷 같은 선물을 많이 가져갔어요. 해를 거듭하며 아이들을 만나보니 선물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죠. 언젠가 태국에서 ‘와디’라는 아이를 만나 선물을 잔뜩 안기고는 이 중에서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으니 ‘당신이 여기에 와준 게 가장 좋다’고 대답하는 거예요. 울컥하기도 하고, 충격받았죠. 소위 ‘쓰레기 마을’로 불리는 오지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이들은 사람이 가장 그리운 거죠. 그 뒤로는 물질적으로 무언가를 해주려 하기보다아이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려고 애써요.
봉사활동을 빼고는 쉴 틈 없이 작품만 해왔죠? 왜 이렇게 안 쉬었어요? 불안해서요. 무언가를 계속 해야만 할 것 같았어요. 계속 하다 보면 연기가 늘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마냥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계속 하다 보면 요령은 생기잖아요. 카메라 테크닉 등 현장이 움직이는 상황에 대해서는 요령을 터득할 수 있는데 연기에는 요령이 없는 것 같아요. 맡는 배역이나 소화해야 하는 감정 표현은 늘 새로운 거니까요.
요령 없이도 그간 작품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죠.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있는 것 같아요. <내 딸, 금사월>은 최고 시청률이 무려 31.7%였어요. 대본을 읽을 때 끌린 작품을 선택해왔어요. 시청률은 잘 나왔지만 아쉬운 점도 있죠. 캐릭터가 극의 마지막까지 매력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거든요. 물론 수치로만 보면 감사한 기록이죠. <내 딸, 금사월>은 영화로 치면 천만 관객 이상이 들었다고 해도 좋을 작품이니까요.
배역 이름이 작품의 타이틀이 되는 기분은 어떤가요? 기분이 이상해요. 좋은 점이 있는 만큼 스트레스도 컸어요. 백진희가 없어진 것 같다고 할까요. 한동안 어딜 가든 백진희가 아니라 ‘사월이’로 불렸으니까요.
모든 연령대를 겨냥한 드라마의 경우 이야기가 자칫 가벼워질 수 있죠. 깊이에 대한 갈증은 없어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스토리와 캐릭터에 대한 갈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요. 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배우들이 느끼는 감정일텐데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갔거든요. 점점 갈증이 심해지면서 ‘이래서 어렵고, 이래서 힘든 거구나’ 하고 느껴요.
차기작이 부담스럽지는 않고요? 네. 그렇지는 않아요. 평생 연기를 할건데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면 제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몇 년 전만 해도 모든 것이 부담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스스로를 혹사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연기하는 사람은 나고, 내가 못 버티면 안되는 거니까 크게 힘들이지 않으려고 해요. 때로는 결과에 의연해야 할 필요도 있고요. 몰랐는데 배우라는 직업은 자기애가 많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사실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고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어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믿는 부분이 있죠? 기본적으로 저는 성실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에요. 그런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의 성실함, 그거 하나는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배우 백진희에게는 선한 이미지가 있죠. 그걸 좀 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니요. 저는 더 선해지고 싶어요. 의도적으로 선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에요. 어색해서 많이 웃었던 것이 습관이 되니까 잘 웃는 사람으로 인식된 것 같아요. 저는 지금이 좋아요. 대단한 아우라를 지닌 배우가 되는 것도 좋지만, 호감 가고 친근감이 드는 배우가 되는 것도 그만큼 어렵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에 맞는 역할과 분위기를 잘 만들어나가는 배우라면 더할 나위 없고요. 평소에는 무채색인데 작품에 들어가면 또랑또랑해지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